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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어



“숸생님! 이거. 지퍼.”

아침부터 누가 반말인가 싶어 최대한 구겨진 인상을 하고 쳐다봤더니 다문화 학생 이파벨이다. 바로 구겨진 인상을 쫙 펴고 고장 난 잠바 지퍼를 고쳐 쭉 올려 주었다. 쭉 질주하는 지퍼가 왠지 기분 좋은 하루를 선물해 줄 것만 같은 상쾌한 느낌이 들었다.


1교시는 발표하는 법, 발표를 잘 듣는 법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발표와 경청의 좋은 예, 나쁜 예를 몸소 시범으로 보이면서 아이들에게 신나게 설명했다.

온몸을 불살라 열정적인 1인 극(?)을 선사했음에도 불구하고 길어진 설명에 아이들이 금세 산만해졌다. 얼른 2교시 자기소개에 대하여 말해주었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유영미입니다. 저는 안산에 살고요. 저는 모든 음식을 좋아합니다. 가장 소중한 것은 우리 가족입니다.”

이렇게 발표하는 것이라고 시범을 보이고 나니 아이들의 눈빛이 다시 반짝였다. ‘음. 저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지.’하는 표정이었다.


차례대로 학생들의 발표가 시작되었다. 교실 앞쪽 가운데에 의자에 앉아 한 명씩 내 옆에 서서 발표를 도와줄 생각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000입니다.”

좋은 시작이었다. 그런데 그다음에 말을 안 한다. 내가 쳐다봤더니 나를 같이 쳐다보더니 묻는다.

“뭐 말해요?”

“음. 00이가 좋아하는 음식?”

“아, 김치찌개를 좋아합니다.”

또 말이 없다. 아까처럼 쳐다봤더니 또 묻는다.

“그다음에 또 뭐 말해요?”

“음. 소중한 물건?”

“아, 포켓몬스터 카드가 소중합니다.”

포켓몬스터 카드 이야기에 장내가 술렁였다. 각종 포켓몬의 이름, 한때 유행했었던 띠부실 이야기, 요즘 아이들이 열광하는 가오레 게임까지 아이들은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 2번 학생을 불렀다.


“안녕하세요. 저는 000입니다.”

또 말이 없다. 1번이 발표한 상황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한 문장을 말하고 나를 쳐다보고, 또 한 문장을 말하고 나를 쳐다본다.

미리 시범을 보여줘도, 칠판에 써줘도, 친구 발표 후에 또 설명을 해줘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스물네 명과 똑같은 인터뷰를 했다.


스물네 명의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아이들은 모두 오징어가 되었다. 고온이 아니라 미지근한 온도의 열을 받아 서서히 비틀어져 책상 위에 엎어져 버리고, 의자 위에 걸쳐진 형상이 되어버린 스물네 마리의 반영구 오징어들을 보자니 자괴감이 몰려왔다.

‘얘들아, 힘들었지? 발표하느라, 듣느라 정말 고생 많았다. 선생님이 잘못했다. 미안하다.’


마음속으로 아이들에게 사과했다. 심란한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서 아이들과 동요를 부르기로 했다. 유튜브에서 검색을 했더니 마침 ‘문어의 꿈’이 떴다. 아이들은 바로 ‘문어의 꿈’을 주문했다. 아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신나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 태세 전환은 무엇일까?)


“나는 문어. 꿈을 꾸는 문어.”

넋이 나간 채로 자막을 읽어 내려갔다. 이 노래는 많이 들었지만 이렇게 진지하게 가사를 쳐다본 것은 처음이었다. 가사 속의 문어는 꿈속에서는 뭐든 될 수 있다면서 초록색 문어, 빨간색 문어, 줄무늬 문어가 되더니만 급기야는 오색찬란한 문어가 되었다. 그러더니 드디어 킬링 포인트가 나왔다. 콧소리와 꺾기가 가득한 뽕필의 외침!

“야~아아아 아아 야~ 아아아 아아.”

아이들은 배와 코에 힘을 팍! 주고 목청 높여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그 ‘아아아’가 지치고 슬픈 내 마음을 건드렸다. 따라 불렀다.


“야~아아아 아아 야~ 아아아 아아.”

소주 두 병은 마셔줘야 나오는 깊은 슬픔이었다. 나도 모르게 마스크 속으로 슬픈 마음을 질렀다. 난생 처음 크라잉 창법을 구사해 봤다. 아니 그냥 크라잉이었다.


“깊은 바다 속은 너무 외로워.”

아! 문어는 외로웠던 거다! 그래서 그렇게 슬프게 질렀던 것이다. 계속 가사를 들어보니 매일 꿈을 꾸는데 이곳은 참 우울하다고 했다.

이 노래가 이렇게 슬픈 노래였구나. 외롭고 우울한 문어의 애환이 담긴 이 노래, 어쩐지 오늘 내 신세 같았다.


“선생님, 한 번 더 불러요.”

그래. 그러자. 딱 한 번만 더 부르기로 했다. 그 제안이 고마웠다.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신나게 불렀지만, 나에겐 꼭 필요한 4분이었다.


그래. 문어로 살자. 1학년 담임은 외롭지만 난 매일 꿈을 꾸기로 했다.


칠판 앞에 분필 들고 서면 나는 초록색 문어.

학교 담장 개나리꽃 필 때 나는 노란색 문어.

아이들과 줄넘기를 하면 나는 길쭉이 문어.


이렇게 1년을 살기로 했다. (야~아아아 아아 야~ 아아아 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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