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군가에게 존중받을 만한 사람인가
예전에 가깝게 지내던 지인에게 정말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반갑기도 하고 축하할 일이라도 생긴 걸까 궁금한 마음에 밝게 전화를 받았다. 안부를 묻더니 시시콜콜한 얘기를 늘어놓는다. 영 불편한 기시감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는 곧 머뭇거리며 본론을 꺼냈다. 정말 중요한 보고서를 영문으로 제출해야 하는데 번역을 좀 해줄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꽤 자주 일어나는 일인데도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참 난감하다.
이런 부탁을 하는 지인들에게는 세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나. 우선 이런 부탁을 하게 되어 미안하다로 시작해서 나중에 밥을 사겠다는 말로 마무리 짓는다.
둘. 분량이 얼마 안 된다며 금방 해치울 수 있을 거라고 나를 과대평가한다.
셋. 이들과 나의 관계는 친한 친구와 그냥 아는 지인 사이 어딘가쯤에 애매하게 자리 잡고 있다.
마음 좋게 해주고 싶지만 사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내가 동시통역사가 아니라 셰프라면 어땠을까?
"정말 이런 부탁해서 미안한데... 우리 집에 정말 중요한 손님이 오시거든? 그래서 말인데, 잠깐 들러서 음식 좀 해줄 수 있을까? 별것도 아니야~ 내가 재료는 준비해 뒀으니까 보고 그냥 맨날 하던 데로 몇 가지만 차려주고 가면 돼. 네가 하면 일도 아니잖아? 내가 나중에 밥 한번 살게!"
나는 대충 이런 얘기를 들은 것이다. 정말 별것도 아닐까? 셰프라면 어떤 상황에서 요리를 하든 맛없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나에게도 직업정신이라는 것이 있기에 무슨 일이든 떠맡게 된다면 대충 할 수만은 없다. 요리를 할 때 먹는 사람의 취향을 고려해야 하듯, 번역을 할 때도 원문의 정확한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 재료에 따라 요리가 결정되듯, 번역 또한 원문의 퀄리티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셰프에게는 각자 전문분야가 있다. 한식전문 셰프에게 프랑스 가정식을 요구한다면 어떻게 될까? 나 또한 주로 다루는 전문 분야가 있고, 부탁받은 글의 내용은 굉장히 생소한 주제일 경우가 많다. 그러니 번역을 하기 전에 우선 최소한의 배경지식부터 쌓아야 한다. 별것도 아닌 일이 아닌 것이다.
예전에는 이런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 너무 바빠서 도무지 신경 써줄 겨를이 없을 것 같으니, 대신 정말 실력 있는 번역사를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소개해준 번역사 친구는 견적으로 70만 원을 제시했고 결국 그 의뢰는 없었던 일이 되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누군가의 부탁을 거절하니 공연한 미안함에 마음이 불편하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존중받지 못했다는 느낌에 왠지 서글퍼졌다. 존중받고 싶다면 나부터가 먼저 상대를 존중해야 하는 법인데, 과연 나는 누군가에게 존중받을 만한 사람인지 자문해 본다. 나 또한 제 값을 치르지 않고 셰프의 요리를 즐기려 하지는 않았는지, 한식전문 셰프에게 프랑스 가정식을 요구한 적은 없는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