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의 아이러니
되도록 매일, 적어도 이틀에 한 번은 반려견 꾸러기와 산책을 나선다. 가끔 우리는 매번 가는 길 대신 새로운 산책코스를 찾아 모험을 해보기로 한다. 빡빡하게 반복되는 일상에서 시도해 볼 수 있는 작은 일탈이자 소소한 즐거움이다.
한 번은 무작정 꾸러기가 이끄는 데로 따라가 보았는데 이 녀석은 기특하게도 집 근처 작은 도서관 뒤편에 위치한 숨겨진 산책로를 찾아냈다. 사색의 길이라고 도서관에서 이름 붙인 길에는 아무도 찾지 않는 듯 잡초가 무성했다. 잡초와 억새에 가려져 잘 보이지도 않는 길을 그저 꾸러기가 이끄는 대로 따라 들어가 보니, 안쪽으로 작은 정원과 흔들 그네의자가 숨어있었다.
꾸러가, 심봤다!
햇살이 비치는 이 작은 정원을 처음 발견했을 때, 마치 동화 속에 들어온 듯 몽환적이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토끼굴에 빠진 앨리스가 어두운 복도에서 바라보았던 정원의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이렇게나 멋진 곳이 주민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모양이다. 꾸러기와 사색의 길을 찾을 때마다 그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고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심지어 울타리까지 쳐 저 있어 꾸러기의 가슴줄을 풀어줄 수도 있다. 정말 제대로 심봤다.
신이 나서 뛰어다니며 이곳저곳 냄새를 맡는 꾸러기를 보면 흐뭇한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스스로 찾아낸 새 산책로가 꽤나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언제까지고 나와 꾸러기만의 비밀 아지트로 남아주길 바란다면 너무 큰 욕심이겠지…?
누구에게나 마음에 안정을 주는 공간이 필요한 법이다. 사색의 길 뒤편에 위치한 그네의자는 이제 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나만의 안식처가 되었다. 물론 집이 주는 아늑함에 비할 바 아니겠으나, 어느 순간부터 모든 것이 남편위주로 맞춰져 있는 우리 집은 당분간은 내가 원하는 색으로 채워가기 어려워진 것 같다. 꾸러기 덕분에 멋진 아지트가 생겼으니 이 기특한 녀석을 더 살뜰히 챙겨보기로 한다.
꾸러기가 자유롭게 정원을 탐색하는 동안 흔들 그네의자에 앉아 가만히 햇살을 즐겨본다. 그러고는 어느새 옆에 와 앉아있는 꾸러기에게 내 속 시끄러운 얘기들을 털어놓는다. 알아듣기라도 하는 듯 이 녀석은 내 무릎에 턱을 받치고 한숨을 내뱉곤 한다. 그렇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집에 돌아오는 발걸음은 그저 가볍기만 하다.
결혼 후 혼자 있는 시간이 부족하다고 하소연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소방관을 남편으로 둔 나는 그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곤 했다. 남편의 특이한 근무 구조덕에 나는 이틀에 한 번꼴로 혼자만의 시간을 원 없이 보낼 수 있었으니까. 남편이 쓰러진 후에야 그 친구들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지난 이 년간 홀로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혼자 보내는 시간이 사라지면서 나는 점점 더 외로워졌다.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도 왠지 모를 공허함을 느끼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에게도, 가히 소울메이트라 할만한 친구들에게도 나라는 사람을 완벽히 보여주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문득문득 찾아오는 공허함은 온전한 내 모습 그대로를 이해받지 못하는데서 찾아오는 외로움이 아닐까?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진정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공간, 그저 조용히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을 보니 산책을 갈 시간이 되었나 보다. 동물의 육감이란! 남편옆에서 자고 있는 줄 알았더니, 어느새 내 발밑에서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는 꾸러기와 눈이 마주쳤다.
꾸러가, 산책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