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줄 아시길
한동안 회사일로 바빴다. 정부부처의 방문 일정이 잡혔고, 회사에서는 TF팀을 꾸려 며칠간 회의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동시통역 부스에 2인 1조로 들어가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날 통역이 필요한 사람은 외국인 임원 한 명이었기에 혼자 위스퍼링*으로 통역을 하게 되었다. 중요한 회의인만큼, 나에게도 미리 회의자료를 받아 꼼꼼히 내용을 파악해 두라는 당부가 있었다.
(* 1~2명이 통역을 들을 경우에 한해 통역사 1명이 바로 옆에서 ‘속삭이듯’ 작게 통역하는 방식)
방문객들이 도착하고, 외국인 임원과 함께 약간은 긴장한 채로 회의실에 들어갔다. 명함을 주고받으며 악수를 하던 무리 중 한 명과 눈이 마주쳤는데, 그가 화색을 띠며 불쑥 이렇게 말한다.
"여직원분이 미인이시네요. 여기 앉아요."
여직원, 미인, 앉아요? 이 짧은 말에 나를 후려치는 단어가 3개나 있다는 것도 놀랍다. 날더러 가장 높은 직책을 가진 분의 옆에 앉아서 통역을 하라는 것이었다. 순간 머리끝까지 화가 났지만 회의 준비하느라 고생한 팀원들의 간절한 눈빛이 보였다. 회의가 잘못되면 회사에 피해가 있을 수 있음을 모르는바도 아니었다. 나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 통역을 듣는 분의 뒤에 앉아야 함을 정중하게 설명하고 외국인 임원 뒤에 숨듯이 앉았다. 불편한 마음을 꾹 참고 통역을 마쳤고, 회의가 끝나자마자 도망치듯 회의실을 나왔다.
우선 밝혀두자면 나의 외모는 그리 훌륭하지 않다. 어쨌거나 여자라면 누구에게라도 망설임 없이 외모에 대해 언급하는 그들이 견딜 수 없이 싫었고,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여성을 분위기 메이커 정도로 낮춰보는 인식에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더 화가 나는 것은 그 상황에서 아무 말하지 못하고, 심지어 웃으면서 대처했던 나 자신이다. 나의 침묵으로 인해 오늘과 같은 상황이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이 반복될 것인가를 생각하니 스스로가 너무 비겁하고 혐오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정말 참는 것이 능사였을까? 그 상황에서 더 현명하게 대처할 수는 없었을까?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여러 물음에 여전히 답하지 못한 채 이 글을 쓴다. 그들에게 못다 한 얘기를 간접적으로나마 전하고 싶어서.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직책대신 남직원이라 불리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여직원이기전에 통역사입니다. 통역을 하러 간 자리에서 외모로 평가받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저 여자라는 이유로 누군가의 옆에 앉아야 할 이유 또한 없습니다. 여성전체를 얕잡아보는 여러분의 시각에 깊은 유감을 표합니다. 부끄러운 줄 아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