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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줍음 May 07. 2024

이럴 땐 내가 정말 좋은 선생님 같다!

중간고사 대체과제를 제출안한 학생에게

이럴 땐 내가 정말 좋은 선생님 같다.

나는 3년째 1주일에 하루, 학생들을 가르치는 겸임교수 역할을 하고 있다.

오늘은 중간고사 대체 과제를 제출하지 않은 한 학생으로부터 한 통의 쪽지를 받았다. 사실 더 일찍 와 있었는데... 날짜를 보니 내가 늦게 확인한 거다. 어쨌든 학생들과 수업하다보면 종종 있는 상황이고, 학생들마다 호소하는 사정이나 희망사항도 다양하다.      


오늘 이 학생의 쪽지 내용은 대략 이렇다.

우선 이 학생은 내가 다음 학기에도 이 수업을 할 예정인지에 대해 알고 싶어 했다. (흠, 아마도 재수강을 고려하는 것 같은 데... 다행히 나에 대한 이미지와 내 수업이 나쁘지는 않았나보다 라고 일단 안심은 되었다) 그리고선 자신이 왜 제출 마감기한을 어겼는지에 대해 자신의 상황을 이야기해주었다. 요약하자면, 자신은 진로에 대해 서툴고,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휘둘리듯 살아가는 자신이 싫증 났다고 했다. 그런 상황에서 중간고사 대체 과제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써내라고 하니 적을 수가 없었고, 한낱 종이 쪼가리에 자신의 꿈과 진로에 선을 긋는 게 싫었다고 한다. 그런데 집안 안팎의 형편상 제대로 해야겠다는 압력을 받고 있었고, 힘든 나날속에서 뭐라도 해야겠다고 다짐은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본인의 두서없는 글을 사과하고, 본인이 뭘 전달하고 싶은 지, 하소연을 하고 싶은지, 상담이 필요한 건지, 그게 아니라면 다시 기회를 붙잡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고 했다. 글을 읽으면서 학생의 답답한 상황과 마음이 파도처럼 내 마음에 밀려드는 것 같았다. 바로 앞에 있었더라면, 괜찮다고, 등이라도 토닥토닥 해주고 싶었다. 사실 나에게는 뭘 말해도 괜찮았다. 하소연을 하든, 상담을 요청하든 나는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고, 필요하면 조언도 해줄 수 있었다.(이런 내 마음의 상태가 교수이자 어른으로서 나에게 안정감과 함께 효능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사실 나는 이미 몇 마디 조언을 이미 해주었다. 그대로 두면, 다음 주 월요일 수업까지 그대로 두면, 이 친구의 힘든 나날이 더욱 길어지니까, 그날 혹시 이 친구가 수업에 안 나온다면 내 진심을 전할 기회조차 없을지도 모르니까.. ‘지금 당장’이어야 했다.  

    

내가 학생에게 말해준 이야기가 또다른 누군가에게도 위로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거의 그대로 옮겨본다. 학생에게는 보내는 분량이 1000자 제한이라 마음의 소리가 조금씩 생략된 부분도 있기는 하다.     

‘진로는 누구에게나 서툴고 어려울 수 있습니다. 저는 수업시간에도 몇 번 말씀드렸지만 제 나이 36살에 직업을 가진 사람이잖아요~ㅎㅎ
 내 삶에 정해놓은 방향과 목적이 없으니 이 사람 저 사람 말에 영향받고, 휘둘리고, 세상에 표류하는 배처럼 느껴질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목적과 방향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아무리 튼튼한 돛을 세워도 모진 풍랑에 부러질 수 있고, 바람이 아예 안 불거나 역풍이 불어 우리를 더욱 힘들게 할 수도 있겠지요?
 
 단지, 우리 수업의 취지는.. 고민하자는 겁니다!^^ 생각을 하자는 겁니다!!!

내가 어떤 삶을 살아갈지? 어떤 돛을 달고, 어디를 향해 나아갈지? 내 삶의 방향과 목적에 대해 고민해보자는 겁니다. 지금 당장 결론을 내리지 않아도 되구요, 내린 결론에 대해서도 언제든지 새로운 대안과 가능성으로 변경할 수도 있습니다!
 과제는, 음... 일종의 내가 지나온 점 같은 거? 그 점들이 모이고 모이면 나중에 선처럼 연결할 수 있겠죠? 조금 삐툴어져도 괜찮아요, 지금은 그게 일탈이나 실패처럼 보여도, 나중에 멀리서 보면, 그 조차도 다 필요한 과정이었을 겁니다!!!^^
 
 인생에 무익한 경험은 없다! 다만 내가 뭘 배워야 할 시기가 되었을 뿐. 제가 좋아하는 말인데요, 우리는 이 경험과 시기를 통해 무엇을 배워야 할까?를 열심히 찾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시간 되면 수업 후에 같이 점심할래요?’ 제가 살게요^^. 라는 말은 글자 제한으로 못 붙였지만 이런 내용이었다.    

그리고 다음에 만나 밥을 먹게 되면 이 이야기를 꼭 해주려고 한다.


‘현재 계속되는 실패와 좌절 경험속에서 자존감도 많이 낮아졌고, 자신감도 떨어졌다고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힘든 나날속에서도 뭔가 해보려고 다짐하고 시도하는 사람이잖아요?! 실패와 좌절경험은 시도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놓지 않고, 누군가에게 자신의 신호를 보내고 연결을 시도하는 사람, 나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는 사람에게 자신을 표현하는 사람이란 건, 그만큼 자신을 사랑하고 지키는 힘, 살아갈 힘이 있는 사람이란 증거입니다!!! 본인은 아마도 신중하고 내면의 힘이 더욱 강한 사람일 거요! 천천히 간다고 불안해하지 마세요! 자신을 믿고, 자신의 속도대로 가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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