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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애 Sep 24. 2020

멀티플레이어는 못되어서

한 번에 하나만




요리를 시작하려고 준비하면 설거지가 눈에 밟히고 시선은 식기 건조대 속 쌓인 그릇으로 이동한다. 살림꾼이라면 요리하면서도 설거지를 동시에 해내야 한다고 했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예열이 필요한 스테인리스 팬을 약불 위에 올려두고는 팔을 걷어 고무장갑을 꼈더랬다. 요리하면서, 밥 먹은 뒤에 나온 식기들로 가중될 나중의 일감을 줄이고 있다는 희열에서 어느새 빠져나와 보면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참참. 팬에 서둘러 포도씨유를 두르고 재료를 넣어 볶아도 의도치 않은 탄맛이 가미되고 만다. 말끔하게 식기를 씻어 정리해두었음에도 뒷맛이 쓰다.






끼니를 자주 만들어 먹다 보니 알겠다. 설거지는 그때그때. 요리와 설거지를 동시에 해내는 일에도 순서가 있다. 밥에 뜸을 들일 때, 재료에 맛이 베어들 수 있게 졸여야 할 때, 뜨거우니 한 김 식힐 때. 씁쓸하게 배 채우기를 반복한 뒤에 요리할 때는 요리만 하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월남쌈을 만들려고 오이, 당근, 양파를 꺼내왔는데. 랩에 쌓인 오이를 세 등분으로 나누어 통에 소분하고, 필요한 당근 1/3개를 위해 당근 한 개 껍질을 까는 김에 흙당근 하나를 더 손질했다. 깐양파가 얼마 남지 않은 걸 보고 양파망 속 양파들의 껍질을 바라보다가, 그쯤에서 그만두었다.





장을 보러 가서 차려낼 밥상을 그리며 모자라겠지, 결정하지 못한 채 마트 한 바퀴를 돌고 나면 바구니에는 제대로 된 반찬이 될 수 있을지 걱정되는 나물감 채소들이 끼여있었다. 데치고, 볶고, 끓이며 3구 가스레인지가 최대 화력으로 열일하여 차려낸 밥상인데도 무슨 맛으로 먹었는지 기억에 남지 않을 적도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나만의 루틴을 마치면 한 시간이 훌쩍 지나있다. 아이를 깨워 준비시키고 홀로 집으로 돌아와서 내키는 순서대로, 때에 따라 나름의 순위를 매겨 집안일을 해나간다. 한 시간이 꼬박 지나면 밥 생각이 든다. 머릿속에서 점심 메뉴 후보들을 놓고 고민을 하다가 저녁 메뉴까지 이어진다. 전날 만들어 둔 볶음밥이 든 통을 만지작거리다 냉동실 문을 닫았다. 다음날 해 먹겠다며 사 둔 아보카도가 냉장실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보다도 전에 구매한 명란젓도 있었다. 더 이상의 고민은 불필요했다. 재료의 유통기한만 짧아질 뿐. 허기를 느끼며 바로 아보카도와 명란젓 손질에 들어갔다. 음식을 만드는 데는 시간이 걸리고 요리하는 마음은 음식에 담기니까. 더 배고파지기 전에 서두르자며.









잘 해내는 것보다 끝까지 해내는 성취를,
개운함을 맛보고 싶다.





멀티플레이어가 못 되는 내게 한 가지만 선택하는 과감한 기백이 필요하다. 요리할 때는 요리만! 보드라운 아보카도 식감, 그와 짭짤한 명란젓의 조화로 입안이 즐겁다. 그릇을 싹싹 비우니 새로운 알람이 울린다. 뽀송하게 세탁된 옷가지들을 탁탁 널고 조금 식은 커피잔을 들고 침대에 누웠다. 이틀 전 보다 만 <작은 아씨들>을 이어볼 생각에 벌써 흐뭇해진다. 한 번에 하나씩 해나가다 보면 한꺼번에 처리한 만큼 일을 해낼 때도 있다. 어떻게든 해낸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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