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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윤 Dec 14. 2022

뭐? 쌍꺼풀 수술을 하라고?

“여자 의사는 레지던트 때 결혼 안 하면 평생 못할 확률이 높다.” 

선배들의 충고인지 조언인지를 들었다. 의사 동기들을 보면 대부분 그 법칙을 따라간다는 것이다. 이 말은 남자 선배뿐만 아니라 여자 선배들도 동의하는 바였다. 일단 전문의를 따면 현역 기준 31살이다. 나이가 삼십대다. 거기다 남자 측에서 전문의는 레지던트보다 부담스러운 존재라는 거다. 그런데 여자 의사는 자신이 설정한 조건을 통과한 남자를 원하므로 쌍방 매칭이 어렵다는 거다. 그래서 결국 골드미스의 길을 가게 된다는. 반대로 남자 의사들은 상반된 충고를 듣는다. “전문의가 되면 훨씬 선택의 폭이 넓어지니 20대 때는 절대 결혼하지 마라.”      

사실 이런 종류의 성차별적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지극히 현실적인 충고들은 의과 대학에서부터 들었다. “여학생들은 지금 옆에 있는 남학생들이 지질하게 보이겠지만, 10년 뒤에는 이만한 신랑감이 없으니 지금 잡아둬라. 나중에는 잡고 싶어도 못 잡는다.” “여자 의사는 공부할 시간에 외모를 가꾸는 게 효율적이지. 마이너스 통장으로 성형수술을 해보는 게 어때?” 써놓고 보니 조언이라고 해도 전달의 방식이 폭력적이긴 하다.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며, 보편적이지는 않음을 밝힌다. 하필 내 주변에 그런 조언을 날리는 사람들이 있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대학생 시절의 나는 짓궂은 남자 선배들의 이런 조언들에 절대 기죽지 않는, 아니 정확히는, 않는 척하려 애쓰는 드센 여자 후배였다. 공부는 빡쎄게 하고, 술도 빡쎄게 마시고, 말발로도 지지 않으려는. 일부러 그들이 여자에게 강요하는 여자다움을 경계했다. 아마 그래서 저런 날것의 공격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열심히 공부한 덕에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에서 의사 생활을 시작했다. 서울로 가야 했던 1번 이유는 좋은 남편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어느새 28살이 된 레지던트 2년 차인 나는 두려웠다. 전문의 취득을 위한 레지던트 수련 기간은 총 4년이다. 그러니 나는 선배들의 경험담에 의하면, 결혼이 가능한 기한이 3년 남았다는 뜻이다. 병원 안에서 짝을 만나기는 이미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인턴과 레지던트 1년 동안 여자다움을 포기하고 지냈던 탓이리라. 사실, 나의 내면의 매력을 알아줄 선구안의 남자가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그야말로 근거 없는 자신감이었지만. 

서울에 연고도 없는 나는 병원 밖에서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할 방법이 없었다. ‘이러다가는 진짜 결혼 못 하겠구나.’ 결혼을 꼭 하고 싶었던 나는 슬슬 두려워졌고 소개팅을 구걸하게 되었다. 몇 차례 시도했으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러던 중 친한 성형외과 동기 언니가 진심 어린 조언을 해줬다. “쌍꺼풀 수술을 해보는 게 어때? 너는 얼굴형은 좋으니까 눈만 수술해도 효과가 아주 좋을 것 같아.” 뭐? 쌍꺼풀 수술? 성형미인이 넘쳐나는 시대에 외까풀의 매력을 알아줄, 외면보다는 내면을 중시하는 남자를 만나리라. 그래서 내 외까풀 눈이 그런 남자를 알아보게 해 줄 매력 포인트라고까지 생각했던 나다. 수술하려고 했으면 대학 들어가기 전에 진즉 했을 거다. 그런데 이제 와 쌍꺼풀 수술을 하라니. 나의 10년간의 신념에 반하는 것이니 가당치도 않은 소리라고 여겼다. 


시간은 흐르고, 소개팅에서 별다른 성과도 없던 중, 우연히 운명과 같은 문장을 접했다. 최진석 교수의 EBS 인문학 강의였던가. “세상을 보고 싶은 대로 보지 말고,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 통찰입니다.” 대략 그런 문장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순간 띵하고 도를 깨우친 것처럼,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쌍꺼풀 수술을 해야겠다. 소개팅은 초반 3초가 호감을 좌우한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이지 않나. 내면을 보려면 대화를 해야 하는데, 호감을 느껴야 진지한 대화가 가능한 것 아닌가. 서류에서 탈락하면 면접 기회는 날아간다.’ 결혼을 꼭 해야겠다면, 나를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볼 게 아니라 보이는 대로 봐야 하는 거였다. 불편하더라도 나의 객관적인 모습을 직면하고 인정해야 했다.      

그렇게 28살의 나는 쌍꺼풀 수술을 했다. 여름휴가까지 기다리기는 시간이 아까워 당장 주말에 해버렸다. 팅팅 부은 눈으로 까만 뿔테 안경을 쓰고 교수님과 회진을 돌았다. 어떤 보호자는 “선생님, 눈에 뭐 하신 거예요?”라고 대놓고 묻기도 했다. 병원에서 나를 아는 모두가 놀랐지만 나를 진짜 아껴주는 의국 선배는 이런 말씀을 해주었다. 유부남 선배다. “진짜 잘했다. 너의 시작은 미미하더라도 끝은 창대할 것이다.” 그 말이 그렇게 힘이 되었다. 나, 이제 결혼할 수 있겠지?


사진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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