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다.
소개팅은 나에게 전장과 같았다. 애프터라는 승리를 얻어내야 하는.
쌍꺼풀 수술 후 소개팅 건수가 늘어났다. 들어오는 소개팅은 가리지 않고 나섰다. 소개팅 문의는 남자에게 해야 소득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남자는 주변에 남자가 더 많고, 소개를 해주는 데에 있어 생각을 많이 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는 내가 판단할 테니 너무 고민하지 말고 나에게 보내라.”라는 적극적인 홍보문구까지 만들었다. 날씨가 쌀쌀해지는 가을부터 크리스마스 시즌까지는 수요가 많아져 소개팅의 성수기이다. 패션에 소질이 없는 나는 친한 언니들의 도움을 받아 소개팅용 의상(우리는 그것을 작업복이라 불렀다.)을 준비하고 화장법을 익혔다. 이제 확률적으로 성공의 확률이 높아졌다.
처음 본 사람과 대화를 이어나간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병원 안에서는 나름 재미있는 애로 통하는데, 밖에서는 왜 이렇게 재미없는 사람이 되었나. 병원에서 재미를 유도하는 내 치트키는 교수님과 같은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었으니 밖에서 쓰기는 어려운 소재였다. 병원에서만 생활하고, 취미도 마땅히 없다 보니 대화의 소재가 빈약했다. 상대방과의 티키타카도 어려웠다. 대화의 기본 기술이 없었다. 경청과 공감, 적절한 리액션 같은 것. 내가 이렇게 경청과 공감에 젬병인 자기중심적인 인간이었나. 소개팅의 패배는 철저한 분석과 자기반성으로 이어졌다.
굳이, 이렇게나, 열심히 소개팅의 패배를 분석했던 것은 왜일까. 짜증 나지만 소개팅의 주도권은 남자에게 있었다. 승패를 결정하는 애프터는 남자가 하는 것이었으니. 용기 내어 먼저 해본 적도 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소개팅에서 애프터를 받지 못하면 굉장히 우울해졌다. 비록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더라도. 마치 내 존재 자체가 부정당한 듯한 패배감에 힘들었다. 머리로는 이해되지 않는 이런 감정 과잉을 벗어나려면, 내가 납득할 만한 패배의 이유를 찾아야 했다. 또, 그 이유의 방향은 나로 향해야만 승리의 희망이 있다. 만약 상대에게서 이유를 찾는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을 테니까. 나랑 취향이 다른 사람이었네 하는 식의 이유는 마음은 편하겠으나 대책이 없다.
철저한 자기반성, 남녀탐구생활과 같은 남녀 심리에 관한 책들을 섭렵했다. 재미있는 사람이 되고자 신문, 독서, 드라마 등 다양한 콘텐츠들을 수혈했다. 소개팅에서의 나는 진짜 나인가 아닌가 하는 정체성의 혼란이 생길 지경이었지만, 소개팅의 승률이 점차 올라갔다. 주변의 동기 언니들이 놀라며 비결을 물을 정도까지 되었다. 이제 누구를 만나도 애프터를 받아낼 자신이 있다. 주도권은 나에게로 넘어왔다. 이제 그들 중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을 내가 간택하면 되겠구나.
드디어 선택할 주도권을 찾아왔건만, 선택의 기준이 없었다. 결혼은 하고 싶었지만, 어떤 남자와 살면 좋을지는 고민하지 않았던 거다. 이제 나 좋다는 사람은 생겼는데, 만나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모르겠다니. 소개팅은 보통 3번 안에 결정이 난다. 만남을 지속할지 말지. 남자 사람 친구는 “일단 좋다고 하면 한번 만나봐, 만나봐야 알지 않겠니?”란다. 다행히, 애정과 관심에 많이 굶주려있던 나는 나 좋다는 사람에게 쉽게 호감을 느끼는 금사빠였으므로 일단 연애를 시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연애를 시작하니 소개팅 정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연애의 고단함에 비하면.
타인과의 관계에 비추어 보게 되는 자아상을 마주했을 때의 불편함과 당황스러움.
소개팅에서 마주한 나의 모습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연애는 진짜 내 바닥이 어딘지, 뼈저리게 느끼게 했으니까.
혹자는 힘든 연애를 반복하는 나에게 “흙을 계속 주워 먹다 보면 내장이 튼튼해진다. 그 과정이라고 생각해.”라는 위로를 해주었다. 대체 언제까지 흙을 먹어야 되나요.
사진출처: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