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B급브리핑
지난 3월, JTBC 뉴스룸 2부의 문을 여는 <앵커브리핑>에서 쓰였던 말이다. 카타르시스 커뮤니케이션. 원래 소통은 서로를 알아 가는 중요한 통로이다. 소통으로 얻게 되는 이득이라고 하면 서로의 서먹함을 없애고 더 진전된 관계로 나아가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내가 소통하는 공간은 sns가 되었고 소셜 네트워크라곤 하지만 그것이 ‘내 생각만 주야장천 떠들었던’ 것은 아닐지 돌이켜 보게 된다.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 어쩌면 할 수 없다기보다 공감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일방적으로 떠들어 놓고 나 혼자 위안을 얻고, 또 나 혼자 분을 삭였던 것은 아니었는가 하고 떠올려 보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것이 비단 ‘내 생각을 강요(?)’하는 소셜미디어의 문제일까?
아닐 것이다. 오프라인에서도 이런 결과는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들의 공감과 이해를 얻지 못하는 대화를 하는 것은 사람의 반응을 중요시하는 나로서는 지양해야 할 처세이다. 오히려 타인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 내 성격상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나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편이다.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 즉 절박한 마음으로 조언을 구하는 이들에게는 3-4시간이 아깝지 않다. 어쩌면 내 신변에만 문제가 없고 도와줄 사람이 있다면 하루 24시간을 듣고 맞장구쳐 주는 일로 살아도 후회가 없을 것이다.
요즘, 나의 포지션은 화자(話者)보다는 청자(聽者)에 가깝다. 그래서 이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듯싶다. 그러나 나 역시 사람인지라 말하고자 하는 열망이 때로는 끓어오른다. 나조차 제어하지 못하는 화자에 대한 열망은 오늘의 삶을 사는 모든 사람의 힘듦과 지침, 그리고 거기에 더해 타인이 겪지 못하는 어려움까지 내뱉고 싶은 목마름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선입견을 갖는다. 신체적 어려움만 이야기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안타깝다.
다시 카타르시스 커뮤니케이션이란 말로 되돌아오겠다. 나의 이런 간절함이 전해지지 않든, 사람들이 오해하든 그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가 해야 하는 것은 오로지 나만이 정화되는 반쪽자리 카타르시스 커뮤니케이션이 아닌 나뿐 아니라 상대방 역시 위로가 되는 진정한 의미의 카타르시스 커뮤니케이션이다. 오죽하면 그들이 내게 대화를 요청하겠는가?
내 인생의 한 부분을 마치 선생과 같이 이끌어 준 동생은 이렇게 말했다.
‘가끔은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도 있었으면 좋겠다.’
이것은 마치 내게 하늘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인 것 같다.
네가 그 일을 감당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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