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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VEOFTEARS Dec 01. 2017

Maudie의 사람 만들기 프로젝트

영화 <Maudie>와 장애

Spoiler Alert!!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은 이 글을 보지 않으시는 걸 추천합니다!



























영화 <내 사랑> 원제 <Maudie>, 2016 年 作은 국내의 작명 센스가 조금 의심스러울 정도로 사랑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다. <내 사랑>이라 칭하려면 영화 <노트북>에서의 불변의 것이거나 또 다른 영화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와 같이 시공을 초월한 진한 무엇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요소가 없으니 이 영화는 사랑이야기라 할 수없다.


영화 <내 사랑, 2016>. 원제: Maudie, My Love, 2016 포스터. 출처 = 네이버 영화


그러므로 원제인 <마우디> 또는 <모드>라고 칭하는 것이 맞을 듯하다. 영화 마우디는 지금 이야기한 것처럼 사랑 이야기가 아닌 인생을 다룬 한 '사람'의 이야기다.



집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여인 모드는 지체 장애인이다. 어투나 행동으로 보아 정신도 조금 어눌해 보이는 그녀는 독립을 결심하고 일거리를 찾는다.



그러던 중 한 가게에서 가정부를 찾는 구인광고를 낸 한 남자를 발견한다. 그는 에버렛. 갈 곳이라고는 도무지 없는 모드에게는 애버렛이야 말로 한 줄기 희망이었다. 쪽지에 쓰인 주소로 무작정 찾아 간 모드는 에버렛을 만나지만, 무드라곤 단 하나도 없는 남자는 웬 ‘호리호리한 체격을 가진 다리 불편한 여자’가 집안일을 돕겠다니 탐탁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에버렛 역시 고아 출신이라 사랑을 주는 일에도 받는 일에도 익숙지 않다. 그러니 세심한 부분이 부족하고 배려도 없다. 그저 집에 있게 해주는 것이 큰 선심 쓰는 행위다. 그것도 모자라 내내 무시한다.



모든 일에 트집을 잡는 것은 물론 다른 남자와 말을 섞으면 따귀 세례, 집안 곳곳을 간섭하는 등 이러려면 가정부를 두지 말고 제가 다 할 것이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짜증 난다.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은 어디로 사라진듯한 발언. 예컨대 집에서 키우는 개나 닭보다도 서열이 아래라고 한다든가 당신과 (섹스를) 하느니 차라리 나무와 하겠다는 식의 모욕도 서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드는 그의 말에 순종을 넘어 복종을 하며 평생을 보낸다. 인생의 최후보루라고 여긴 남자에게 그런 취급을 당하면서도 모드는 멋진 일을 해낸다. 바로 그림 실력을 뽐낸 것. 처음엔 집안을 화사하게 바꾸어 볼 요량이었으나 그녀의 손길은 누구보다 자유로웠고 표현력 또한 무궁무진했다.



초기엔 부티나는 여인 산드라가 그녀의 그림을 알아줬지만, 그 유명세는 금세 퍼져 매스컴까지 타게 된다. 상황이 뒤바뀌어 이젠 모드가 에버렛을 부양하는 역전의 날이 온다. 그러나 에버렛은 자신의 여인이 유명해지는 것도 시샘해서 모드로 하여금 곁에서 떠나게 만든다.



누구보다도 상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모드. 그런 그녀가 떠나자 에버렛은 후회한다. 그리고 그녀에게로 찾아가 사과하고, 다시 함께 살기로 결심한다. 이제는 떠나지 말아 달라는 남자의 간청 앞에 모드는 이렇게 답한다.



“당신은 내가 필요해요.”     



그 말을 들은 에버렛은 이를 계기로 개과천선한다.



영화의 거의 모든 내용을 스포일 한 것 같으므로 양심 상 결론은 밝히지 않으려 한다.



자. 이 영화에서 장애인은 어떤가? 철저히 무시당하고 힘들게 산다. 비단 영화에서 뿐 아니라 삶의 현장 전반에서 그렇다. 무엇이 그리도 잘났는지 무시가 하늘을 찌른다. 오죽하면 무슨 말만 해도 박수를 치고, 웃으면 좋단다 하고 비웃고 보는 사람마다 반말에, 장애인이 세상 최고의 상전이란 말을 한다.



이런 상황이 생기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사실 장애인을 멀리하는 것은 다름 아닌 두려움 때문이다. 그냥 두려운 게 아니라 만성 두려움이다. 저 사람이 나를 해치지나 않을까. 혹은 저 사람이랑 엮이면 코 뀌는 거 아닌가. 이런 식의 두려움.



잘못된 관념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방어하게 만들고 마주치지 않기 위해 외면하거나 연락을 차단한다.



물론 바쁜 사람도 있다. 결혼, 연애, 학업과 직장생활 등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감안하더라도 정도가 심하다. 소위 안녕하세요 인연들이 수두룩이다. 이럴 바엔 정식으로 허그해주는 행사장 같은 곳에 가서 인사 나누고 허그하는 것이 더 따뜻하지 싶다.



사과를 해야 한다면, 그래도 지금 쯤이 어울릴 것 같다. 당신의 인생에 내가 보여서 미안하다. 진심이다. 그러나 혹 이 사과를 보고 큰 비약이라 생각이 든다면, 부디 당신 주위에 보이는 장애인을 보고 마음에 무시와 조롱을 품거나 겉으로만 웃는 얼굴만을 보이지 말고 당신의 진심을 보여주셨으면 좋겠다.



10년이 다 가도 만나지 않는 인연은 인연이 아니고 지인도 아니다. 1년이 지나도 어떠한 방법으로도 연락이 없는 사람은 없어도 되는 그저 그런 사람이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솔직히 그렇다.



에버렛과 모드의 사랑을 두고 눈물 흘렸다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턱시도와 드레스만 입었다고 혼인을 한 게 아니며, 같이 산다고 다 부부가 아니다. 에버렛은 모드에게 오랜 시간 인간으로서의 존중이 아닌 하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태도로 대했다. 그러니 이 이야기를 두고 눈물 흘린다면 남녀 간의 감정 변화가 아니라 한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과정에 눈물 흘려야 한다.



장애인은 부족하다. 움직임도 말도, 지능도, 몸도…



참 지랄 맞게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부족하다. 하지만 이런 장애인의 지랄 같은 현실은 인내의 왕이 되는 초석이 됐고, 그 인내로 말미암아 한 사람을 변화시켰다.



그래서 나는 감히, 이렇게 묻고 싶다.



당신의 인생… 그 방향을 바꾸는 결정권자가 신이라면, 신께서 당신과 동행할 그 사람을 보내주실 텐데 하필이면, 그가 장애인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대처할 건가?



하긴 영화에서는 한 개인을 바꾸는데 몇 번의 계절이 바뀌던데



그리고 본인의 경우 거창하게 인생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말을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이해하며 받아들이는데 수년이 걸리던데. 우리나라 이 대한민국 장애인 전체에 대한 선입견은 대체 언제쯤 바뀔는지.



지금도 마우디의 속삭임이 귓가에 울린다.      


  

“당신은 내가 필요해요.”    



마지막으로 내가 하나 더 얹고 싶다.



“나는 당신이 필요해요.”



서로가 필요한 세상을 원한다.     



본문 이미지는 영화 <내 사랑, 2016年 作> 스틸 컷이며 ‘네이버 영화’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저작권은 해당 영화 제작사에 있습니다. 더불어 해당 글을 향후 영리 목적으로 사용하게 되더라도 본문에 실린 이미지를 사용하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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