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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VEOFTEARS Apr 25. 2019

無題

낙서 같은 글 한 바닥

생각나는 대로 막 써서 정돈이 잘 되지 않은 글이다.





독자가 없으면 작자는 그 존재 자체가 무의미하며 그 무의미함을 반드시 예로 들어야 한다면 마치 모래성을 멋들어지게 몇 날 며칠 지어놓고는, 스치는 바람에 우르르 무너지는 허무함 같은 것이랄까. 작자로서 그 같은 공포는 너무 잘 아는 바 철칙이 있다면 첫째 자극적이지 않을 것. 둘째 모두가 공감하지 못하더라도 생각해 볼 만한 글을 쓸 것. 셋째 때로는 가벼울 것이다.



이런 소신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돌아볼 때는 첫 번째 항목 말고 두세 번째 항목은 잘 지키고 있나 의문이 든다. 일단 잘 지키고 있는 것부터 들여다보자. 난 400여 편의 글을 써 가며 욕설 한 번 써 본 일이 없다. (물론 실생활에서도 욕을 하지 않는 건 아니다.) 오프라인과 온라인 구분 없이 욕의 본질은 말의 본질과 마찬가지로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으며, 욕이라는 화살은 언젠가 반드시 본인에게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특히나 온라인에서의 욕설 혹은 막말은 영원한 기록으로 남을 수 있어 흑역사가 되어 버리는 수가 있다. (이래서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별개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내가 글 속에 욕을 담아내지 않는 두 번째 이유는 그다지 똑똑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약이 아닌 리얼이다. 나는 소크라테스 선생의 오랜 가르침이 있기 이전 주님의 계획 아래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에 그리 만드셨는지 몰라도 태생적으로 나의 약점을 잘 알고 있다. 다시 말하면 내 주제를 너무 잘 안다는 것.



물론 똑똑하지 않은 이유가 보통의 존재들보다 가방끈이 짧은 탓도 있겠지만, 이건 가방끈의 길고 짧음의 차이로 해결될 게 아니다. 그저 타인과는 달리 얼떨리우스일 뿐. 똑똑하지 않으므로 세상과 인간을 공개적으로 욕할 수 없다. 공개적으로 욕하려면 또한, 그것이 열린 공간에서의 기록이라면 더더욱 불특정 다수의 열람이 가능하므로 뭔가 기승전결이 있고 내 욕설의 타당함이 명확히 드러나야 하는데 그럴 자신이 없다.



때문에 글이 작품이 되는 공간을 지향하는 이곳에서만큼은 인지상정에 따른 최소한의 비판만으로 끝내고 싶지 비난과 욕설이 난무하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 해서 내 브런치 속 글은 정치 사회 미디어, 그리고 미디어 속 등장하는 연예인 이야기 혹은 그것들을 비난하는 글은 없다.



그래서인지 내 브런치는 아니 더 정확히 말해 내 글 전체는 좀처럼 이슈가 되지 않는다. 좀 더 맵고, 앙칼진 단어 선택이나 단짠단짠(달콤 짭짤)한 맛을 내는 매력이 있어야 하는데 싱거워도 너무 싱겁다. 오죽하면 지인 중 누군가가 말하길 티어스님 글에는 선정성이 없어요라면서 우스개를 할 정도였으니까.



요즘 미디어를 보자. 여행/먹방/인권/반려동물/오디션/스포츠/드라마/영화 정도가 전부 아닌가. 여기서 스포츠나 드라마 & 영화를 전통의 미디어라고 가정하고 그 나머지를 새 미디어 방식이라고 가정해보자. 개인적으로 난 요즘의 새 미디어가 재미없다. 뿐만 아니라 염증을 느낄 정도다. 한데 사람들은 나와 달리 새미디어의 관심이 있다. 이러니 내 브런치가 요즘 말로 안물안궁 (안 물어봤어, 안 궁금해라는 신조어인 동시에 줄임말이다.) 한 것은 당연한 일. 그러니 당연히 댓글이라는 대중의 피드백도 적다.          





그럼 똑똑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자극적인 글을 쓰지 못하는 불쌍한 이 영혼은 과연 어떤 주제로 승부를 봐야 할까.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내 길을 가는 수밖엔 달리 방법이 없다. 자극적인 글을 쓰지 못하면 최대한 담백하게 우려낸 글을 쓰면 되고, 새 미디어보다 전통 미디어를 사랑하는 만큼, 이전의 방식을 택하면 된다. 내가 잘하는 것, 아니 잘하지 못해도 할 수 있는 걸 해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생각만 해도 지루하고 짜증 나기 그지없는 장애를 택했고, 장애와 벗 삼아 사는 내 삶을 서술하기로 한 것이다. 물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부조리와 화, 짜증 같은 것들은 누군가에겐 얼굴을 붉힐 만한 불쾌감을 줄 수도 있지만, 장애를 겪는 나는 독자들이 겪지 못하는 여러 해프닝을 겪음으로 해서 그 일들을 알릴 수 있다. 어쩌면 이것이 또 다른 의미의 지식 전달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또한, 장애와 함께 일상을 한다고 해서 장애에만 포커스를 맞출 필요는 없기에 필요와 그날그날의 생각에 따라 다른 주제의 글을 쓰기도 한다. 그중에는 전 세계인의 제일 큰 화두이자 큰 과제인 사랑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이렇듯 실상은 심심하고 싱거운 글을 쓰는 일 조차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는 감정의 흐름과 일상의 다이내믹함은 글의 성격을 완전히 바꾸기도 한다. 또한 마치 세찬 빗줄기처럼 뇌리 속에서 단어의 줄기가 흐를 때면 때때로는 정말 “미쳐버릴 것 같은 희열”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론 그것들을 취합해서 글로 완성시키는 일은 정말 “미쳐버리는 일”이다. ㅋ



다시 이야기 하지만, 난 나만의 길을 간다. 물론 이 글의 서두에서도 언급했듯 독자 없는 작자는 곧 무너질 모래성을 쌓는 허송세월을 보내는 것처럼 무의미하다. 그리 되기는 싫어서 지인들에게 브런치 링크를 남기기 시작했고, 정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지인들 또한 장애인 딱지를 떼고 작가로서 인정해주기 시작했다. 날로 늘어가는 글 요청과 피드백은 글 쓰는 맛을 알게 해 주었고, 그럴수록 더 겸손한 글을 쓰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단 한 번도 그 누구에게 “내 글이 어떠냐.”라고 묻지 않았다. 억지 요구를 하는 거 같아서다. (피드백이란 독자가 마음에서 우러나서 하는 것이 진짜다.)



앞으로도 여태껏 그랬듯 그렇게 할 것이고, 또한 나는 나의 길을 뚜벅뚜벅 걸을 것이다.



대여섯 줄 정도 더 써야 할 이야기를 급히 끝내야 했기에 심히 어색하다. 해서 사족蛇足으로 대신한다.



아주 가까운 과거에 있은 누군가의 피드백은, 피드백이 아닌 마음의 방향을 나무라는 ‘간섭’이었고, 그 ‘간섭’은 여전히 나를 찌른다. 여기서 마음의 방향이라 함은 모두가 짐작할 수 있듯 사랑 이야기다.


       




본문 이미지는 “Unsplash”에서 인용하였으며 “cc0 Licence”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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