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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VEOFTEARS Mar 16. 2020

소속이 명확한 자

차별이 차별을 만나다


일러두기

해당 글은 제가 출석하는 교회인 분당 가나안교회에서 발행하는 계간지인 클릭 가나안(Click Canaan) 2020년 봄호에 실을 글이었습니다. 코로나 19의 영향으로 저희 교회는 3주 전부터 온라인 예배로 전환했는데요. 때문에 클릭 가나안 봄호의 발행 역시 힘들 것으로 보여 브런치에 올립니다. 모쪼록 모두의 노력과 기도가 코로나 19 종식의 시발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원문에는 제 실명을 넣었지만 닉네임으로 대체합니다.


   


안녕하세요. 청년 Tears입니다. 코로나 19(COVID-19)의 여파가 매섭지요. 지난 송구영신 예배 때 적은 연간 기도제목 중 하나는 날씨, 건강, 상황 등이 교회 출석에 방해 요소가 되지 않게 해주시길이었는데요. 결코 작지 않은 요건이 생겼네요. 해서 요즘은 인터넷과 TV로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모쪼록 이 글이 성도님들로 하여금 읽힐 때에는 코로나가 말끔히 모두의 곁을 떠난 뒤였으면 좋겠습니다. 



클릭 가나안에 글을 쓰는 건 꽤나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나눌까 하다가 고민 끝에 결정했는데요. 바로, ‘차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차별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큰 문제입니다. 성 차별과 인종의 차별뿐 아니라 현재는 삶의 질과 환경에 대한 차별도 존재한다고 하지요. 물론 장애와 비장애의 차별도 무시할 수 없는 부류이기도 하고요. 제가 피부로 느끼는 차별이라고 하면 아마 이것일 겁니다. 



예나 지금이나 장애를 대하는 제 모습은 거의 동일합니다. 특별하다거나, 불행해서 못 견딜 정도라든가 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삶인 건 맞지만 그래도 주님이 허락하셨으니 담담히 받아들이는 건 물론이요, 마치 벗처럼 살아야 하는 것. 이것이 제가 장애를 대하는 저만의 방식입니다. 



그런 이유로 저는, 유형과 정도에 상관없이 장애가 있는 친구들이나 선후배들과만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과의 어울림을 지향합니다. 물론 다른 이들 또한 그럴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래도 주위 지인들의 경우를 봤을 때, 이왕이면 장애인 친구끼리 더 자주 어울리는 모습을 봐 왔거든요. 반면에 저는 그렇지 않고요. 솔직히 고백드리자면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비장애인들과만 어울리려 합니다. 좀 유별난가요?



그런데 한 번은 이런 생각이 뇌리를 스쳤습니다. 내게 호의적인 사람과 내가 호의를 갖고 있는 사람, 또 나를 비호하는 사람과 내가 비호하는 사람에게 들이댄 잣대는 과연 동일한가. 그리고 그 형태는 어땠을까. 자문한 결과는 불행하게도 저마다의 편차가 있었습니다. 



제가 장애인 분들보다 비장애인 분들과 의식적으로 더 함께하려는 이유는 필시 인맥의 폭을 넓히고,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간접적으로 나마 경험함으로써 결코 나만이 불행한 것이 아니며, 얼마든지 타인을 품을 수 있다는 마음의 자세를 갖기 위함일 텐데, 한편으론 오히려 이것이 나 자신을 답답하게 하는 행동은 아닐까. 



또 ‘차별의 일상화’를 겪는 저이기에, 차별이 만연한 세상에서 타협하지 않으려 애쓰고 의연함으로 무장하려 했던 노력들이 역으로 2차적 차별을 낳은 건 아닌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됐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를 저의 민낯은 아마도 제가 어디에, 누구에게 속한 사람인지 망각한 탓이리라 생각합니다.  





성경 속 인물 다윗은 어릴 적엔 특별할 게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더구나 골리앗과 맞설 때는 하찮아 보였지요. 그러나 다윗은 당당히 싸움에 임했고, 이겼습니다. 승리를 쟁취하기 이전에 다윗은 자신의 소속을 만천하에 선포하지요.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사무엘상 17장 45절)



하나님의 사람, 다윗! 그의 소속은 명확했고, 그는 자신의 소속을 잊지 않았습니다. 소속이 명확한 사람은 본인이 있는 곳을 사랑하게 되듯 하나님께 속한 그는 하나님을 사랑했고, 그분을 비난하는 자를 향해 품은 거룩한 분노는 거대한 역사를 만들어 내게 됩니다.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세상이라는 임시거처에 터를 잡고, 기껏 해봐야 일생이라는 제한적 시간을 보내지만 때때로 주님의 이름과 존재를 잊고 이곳에서 일어나는 미지의 이벤트들에 어찌 될까 두려워 떠는 아이러니를 마주하게 되지만, 세상이 하나님보다 작다는 것, 아니 그분이 지으신 것이 내가 살고 있는 여기라는 것을 밝히 안다면 생애 가운데 발생하는 수많은 미지의 이벤트를 두려워할 일도 없고, 사람들이 읊조리는 소리 한 줄, 찡긋 대는 눈짓과 정신없는 몸짓들을 향해 눈치 볼 이유도, 거짓을 말할 이유도 없지 않을까요?


 

처세술이란 말도 존재하긴 하지만, 바라건대는 신앙에서만큼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만큼은… 가식 없이 솔직해져 봤으면 좋겠습니다. 소속은 이미 오래전에 명확해졌으니까요! 할렐루야!    



강조드립니다만 성도님들에게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제 마음에 보내는 채찍질쯤으로 여겨 주세요! 



February 24th, 2020



본문 이미지는 “Pixabay”에서 인용하였으며 “cc0 Licence”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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