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레슬링 칼럼 19
코로나19가 불러온 혼돈은 레슬링 계를 강타했다. 뭐, 어디 비단 레슬링 계뿐이랴.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산업이 전 세계를 불문하고 중단됐다. 잠깐 옆길로 새어보자면, 난 4월 말이 되면 자가격리 3달에 이르게 된다. 그러니 인터넷과 벗 되는 건 당연지사. 레슬링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좋아하는 분야가 있다면 게임일 텐데 그러다 보니 하루는 언제나처럼 트위치 스트리밍을 시청하고 있었다. 스트리머는 미국인으로 추정되는 외국인이었고, 주 시청자 층 역시 외국인들밖에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팬데믹 상황은 아니었고, 세계적으로도 심각성이 잘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긴 하지만 그래도 코로나19의 존재 자체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저 인류애적 차원(?)에서… 그보다는 인사치레로 “코로나 바이러스 조심하세요.”하고 말을 건넸다.
그런데 정작 스트리머는 가만히 있고, 수도 없는 채팅 세례가 한바탕 일더니 그나마 착한(?) 시청자가 내게 태그를 건 채 이렇게 말했다. “여기는 중국도 한국도 아니야. 미국이라고. 그런 증상은 여기엔 어디에도 없어. 그리고 난 지난주에 대니얼 바이러스를 앓다가 완치된 뒤라고.” 하며 말하는 것이다. 딱 봐도 중국에 한국까지 언급하는 꼴이 동양인에 대한 비하인 게 틀림없었으나 내게 대놓고 욕을 하지도 않은데다, 대니얼 바이러스라는 생소한 이름이었지만, 혹시 내가 모르는 게 있나 보다 하고 “아니, 그런 게 있어요?” 하고 되물었더니, 돌아오는 말은 “무슨 소리, 농담이지 하하하.”였다.
순간, 난 비웃음거리가 됐다. 그들의 언사와 동조에 이젠 별로 남지도 않은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났지만, 말싸움할 능력도 안 되고 싸우기도 싫어서 그다음부터 무대응 했다. 사실, 그 정도 말을 알아듣는 건 가능하지만, 똑부러지게 말하기엔 자신이 없어 그랬다는 게 더 옳다. 어쨌든, 그렇게 많은 이들로부터 비웃음을 사고 그로부터 몇 주 뒤, 코로나19는 늦게 나마 팬데믹 선언이 됐고, 지금 미국을 포함한 모든 곳은 다들 알고 있는 것처럼 힘들다. 이젠 내 인사에 전부 고마워한다.
코로나19 직격탄! 그럼에도 불구하고 WWE는 1년 농사를 결산하는 행사인 레슬매니아 36를(을) 강행했고, 심지어 트리플 H는 퍼포먼스 센터에서 몇 번 열렸던 위클리 쇼 (RAW와 SMACKDOWN)와 비교하면 안 될 것이라면서 계속 자신감을 내비쳤다. 하지만 막상 당일이 되어 뚜껑을 열어보니 역시나 한산함 그 자체였다. 레슬매니아를 시청하는 기분이 아니라 WWE 수퍼스타들의 일상을 리얼 다큐 형식으로 보고 있는 느낌이랄까. 첫 경기 가부키 워리어스vs 알렉사 블리스 & 니키 크로스의 경기는 내용적 측면을 따지기 전에 무관중 PPV 경기를 적응하기 위한 시발점이었다. 프리-쇼는 보지 않았다.
샬럿 플레어 vs 리아 리플리 경기의 경우 나름 흥미롭게 시청했다. 터울이 꽤 나는 바로 위의 형님도 WWE의 매니아셔서 시작 전에 승자 맞추기를 했는데, 형님은 샬럿 플레어의 승리를, 나는 리아 리플리의 승리를 점쳤다. 그 이유는 형님이 리아 리플리를 잘 모르시기도 하지만 그보다 샬럿 플레어에 대한 빈스 맥맨의 신임이 대단하기 때문이라는…
두 선수의 처절함이 신음소리와 표정으로 다 묻어 나왔다. 공간이 비기도 했고, 그런 열악함을 상쇄시키려는 선수들의 노력이 약간 오버스럽게 연출됐는지는 몰라도 이유가 어쨌든 흥미롭게 시청했다. 다만, 기승전 다리라고 해도 요약이 될 정도로 샬럿은 리아의 다리에 집착했는데 넘겨짚어보자면, 이는 아마도 레슬매니아를 맞아 샬럿이 아버지인 릭 플레어의 유산이기도 한 징글징글한 다리 공격을 팬들에게 선사하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싶다.
다음으로 미즈 & 존 모리슨 vs 뉴 데이 vs 우소즈의 경기. 단언컨대 경기 퀄리티로는 이번 레슬매니아에서 가장 뛰어난 경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사실 이외에는 별로 논하고 싶은 경기가 없다. 알리스터 블랙과 바비 래쉴리의 경기는 왜 했는지 이유를 찾아야 할 정도로 별로였고, 오티스와 돌프 지글러의 경기는 오티스가 당한 로-블로가 꽤나 아플 것 같다는 것과 끝내는 정의(?)가 승리한다는 것! 그 때문에 흐뭇했다는 점이 다이며, 존 시나와 핀드의 대결은 10점 만점에 마이너스 100점을 주고 싶다. 시나와 브레이 두 선수 모두 말 주변과 기믹 수행 능력 측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이지만 아무리 참신한 기획력이고, 그에 걸맞은 뛰어난 서사를 가지고 있어도 레슬링은 레슬링으로 승부 봐야지 플라토닉 대회도 아니고 이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핀드의 주요 Quote가 Let Me In이라고 해도 말이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꼭 몇 분은 언더테이커와 AJ 스타일스의 본야드 매치를 예로 드시면서 “언더테이커와 AJ 스타일스도 링에서 붙은 게 아니지 않느냐!”라고 일갈해 버리시는데, 뭐 맞는 말씀이긴 하다. 그러나 본야드 매치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쫄깃거리게 하는 맛이 있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니라 두 선수의 피지컬적인 맞닥뜨림이 있었기 때문 아닐까 하는 게 내 생각이다. 테이커는 지난 레스너와의 대전에서 패배나 브레이 와이엇과의 대전에서 승리했던 그때보다 훨씬 몸 상태가 좋아 보이긴 하나 이젠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연배임을 감안한다면, AJ 스타일스와의 합은 기가 막혔다고 할 수 있다. 카리스마가 과거 어메리칸 배드 애스 시절이나 빅 이블 시절에 버금 가는 것은 물론 느끼기에 따라서는, 더 농익었다고 봐도 될 정도라 압도되기에 충분했다.
브론 스트로우먼과 골드버그와의 대결이나 브록 레스너와 드류 맥킨타이어와의 챔피언십 대결은 누구라도 결과를 다 맞추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예측이 쉬웠으나, 다만 그 과정이 피니시의 향연으로만 도배된 것이 참 아쉬웠다.
이젠 레전드들의 출연은 반가울지 몰라도 그들의 경기는 반갑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에지와 랜디 오튼의 대결은 퍼포먼스 센터 관광 시간이냐는 자조 섞인 목소리도 있었지만, 오래간만에 멋진 경기를 보게 된 것 같아 좋았다. 또 두 선수가 겨루는 모습을 보며 혼을 담은 연기를 하는 배우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면 오버인 걸까.
아무튼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36주년의 레슬매니아를 떠나보내고, 다음 위클리 쇼를 마주해보지만, 마음 한켠이 역시나 좋지 않다. 코로나19로 인한 어려움 때문이라 어쩔 수 없다곤 하지만, 들리는 바에 의하면 옆 동네 A동은 무관중 상태에서도 좋은 퀄리티를 보여 준다는데, 레슬매니아 36를(을) 마주하고 보니, 연출력이나 기획력은 뛰어나면서 그동안은 태만했구나 싶어 맘이 좋지는 않다.
그에 더해 며칠 전 대규모 임시 해고 소식에 근심은 더해간다. 마지막으로, WWE의 대표적 목소리였던 아나운서 故 하워드 핑클의 영혼 안식을 위해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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