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PTL TIME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VEOFTEARS Nov 14. 2020

참된 감사의 의미를 찾기 위해

PTL Time #45… <지선아 사랑해>

Photo by Herbanu on Pixabay



나는 주일마다 두 번의 예배를 드린다. 코로나19 이전 같으면, 주일 한 번 교회에 다녀온 것으로 스스로에게 만족해서 다른 교회의 예배를 영상으로 드리는 일은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칫 해이 해질지도 모를 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최대한 온라인으로나마 많은 예배를 드리고 있다. 허니 부모님께서 출석하시는 교회의 예배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런 이유로 지난 2주간, 감사의 절기를 맞아 감사에 대한 말씀을 설교를 통해 접했다. 감사의 의미에 대해 돌이켜 볼 수 있어 감사하다.



부모님께서 출석하시는 <분당한울교회>담임목사님으로 계신 김성국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감사하는 마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라는 제목의 말씀이었는데 전하시는 와중 예화를 하나 드셨다. 그런데 일주일 동안 이 예화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분명 예화에 지나지 않지만, 설교 말씀의 주요 내용이기도 해서 글에 녹여 내 볼까 한다.



참된 감사란 대체 뭘까. 내가 요즘 자주 생각하는 부분이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도 있듯이, 우리의 삶에 감사는 끊어지면 안 된다. 한데 어디 그게 쉬운가. 정말 쉽지 않다. 예컨대 원수 같은 사람 아무개와 마주쳐도, 또 길을 가는데 새 한 마리가 머리에 똥을 싸 놔도 아주 불쾌할 것이다. 사람의 기분은 고무줄 같은 탄성이 있어서 이처럼 사소한 데서도 스트레스를 받는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자연스레 감사는 마음에서 멀어지게 마련이다.



도통 웬만하면 예화를 들지 않으시는 목사님께서 감사를 언급하시며, 예화로 든 하나의 사례는 다름 아닌 이지선 씨의 이야기였다. 많은 분들께서 아시는 것처럼 이지선 씨는, <지선아 사랑해>라는 에세이로 유명하시고, 많은 크리스천들의 귀감이 되는 분이다. 지금은 한동대 교수로 계시는데, 그런 의미에서 지금부터는 호칭을 교수님으로 통일하고자 한다.



교수님의 이야기는 정말 많이 알려져 있다. 이지선 교수님은 자신의 친오빠와 함께 차로 귀가하던 중, 음주운전을 하던 마주오는 차와 부딪쳐 화재가 발생했고, 그 때문에 전신의 55%가 3도 이상의 화상을 입게 된다. 얼굴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흔 번이 넘는 극한의 이식 수술로 얼굴을 비롯한 피부 전반을 재생했지만, 이전보다 많이 달라진 얼굴은 당시 젊은 여인의 입장에선 말할 수 없는 좌절… 그 자체였을 것이다.



<지선아 사랑해>에는 사고 당시와 그 이후에 있었던 일들, 그 때문에 끔찍한 고통이 수반돼야만 했던 순간들이 가감 없이 솔직한 문체로 다 담겨 있다. 그러나 그 형언할 수 없는 고통들만을 서술한 책이라면, 이 책은 빛나기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감사를 내뱉고, 뿐만 아니라 입술의 읊조림만으로 끝나지 않는, 실재하는 감사들이 고스란히 담겼다. 감사의 내용들을 보면, 정말 소소해서 이런 것마저 감사할 수 있나 하는 생각에 흐뭇한 미소가 터져 나온다. 얼굴에 미소는 번져 가면서도 눈물 또한 맺히기도 한다. 아마도 소소한 것에 감사한다는 것이 어떤 건지 잘 알 것 같아서 그런가 보다.



이 교수님의 삶은 절대 감사할 수가 없는 삶이다. 아니, 감사는커녕 세상과 하나님을 향한 절망, 그리고 증오가 가득할 지라도 그 어느 누가 그분에게 손가락질할 수 있으랴. 그런데 말 그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실현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공을 전부, 가족들과 하나님께로 돌렸다.



지금으로부터 꽤 오래전에 이런 내용이 담긴 <지선아 사랑해>의 완독을 앞두고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정도의 차이와 상황적 유불리가 달라서 이 교수님과 나를 절대 비교하기에는 많이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교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칭송을 받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쓰임 받는데, 나는 지금 뭘 하나 하면서 자책했던 기억이 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부끄러움과 존경이 피어오르려 할 무렵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의미로 강인하게 붙잡은 한 구절이 있다. 사고 이전의 순간으론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 구절이었다. 물론 그 말에 담긴 진의와 배경은 이것이다. 사고 이전의 삶은 외적으로 보기에도 아름다웠고, 고통도 없었지만, 상대적으로 하나님과 떨어져 지낸 삶이었던 반면, 사고 이후의 삶은 외적으로 보기에 상처도 많고, 고통도 많았지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전적으로 의지하게 됐기 때문에 혹여 시간을 돌릴 수 있는 선택권이 자신에게 있다고 해도, 사고 이전의 순간으론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는 것.



그 구절을 읽자마자 나는 씩씩대며 성질을 내고 있었다. 말이 안 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솔직해야지 어쩌면 그럴 수 있냐면서 속으로 열불을 내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거짓말처럼 내가 출석하는 교회에 이 교수께서 간증 집회를 오셨다. 책으로만 알던 내용을 본인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어 좋았다. 나와 함께 계시던 성도님들은 저마다 눈물을 닦느라 여념이 없으셨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아까 홀로 성질냈었다던 그 부분이 본인의 음성으로 들려졌다. 그리고 그 말씀이 끝나자마자 예배당은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



집회가 끝나고, 예배가 종료되면서 이 교수님께서 퇴장하는 그때, 정중히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는 책 속에 적힌 메일 주소로 편지를 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흔쾌히 허락해 주셔서 이튿날 바로 메일을 보냈다. 일단 간단히 인사와 소개를 마치고, 어떤 이유로 메일을 보냈는지 역시 알려드리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기억을 더듬어 쓰는 것이니 정확한 워딩은 아닐 수 있다.



(당시엔 자매님으로 불렀다.)



“저는 자매님께서 말씀하신 그 말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씀드리면, 용납이 안 됩니다. 저도 주님을 믿고 의지합니다. 주님이 저의 전부이신 것 역시 인정합니다. 물론 세상과 동요되는 나일론 신자 같은 면모도 자주 보이지만 믿음의 분량이 적은 것일 뿐, 아예 믿음이 없다고는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은, 자매님의 생각과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저는 아직도 걷는 것에 대해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소망은, 세월 흐름에 따라 타협되지 않을 겁니다.”(후략)



상당히 도전적이다. 아니, 도전적이다 못해 건방지다.



교수님 입장에서 내 메일은 상당히 불쾌할 수도 있는 메일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의외로(?)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답장이 도착했다. 역시 앞서와 같이 정확한 워딩은 아닐 수 있다.



 “형제님, 안녕하세요. 기억이 납니다. 잠깐 스치듯 인사드렸는데 메일 주셔서 감사해요. 형제님의 편지 잘 읽어봤습니다. 그런 생각이 드셨군요. 그런데요 형제님, 제 생각과 형제님 생각은 다를 수 있어요. 하나님은 각자에게 다른 모습으로 와 주시잖아요. 우리의 인격에 맞추어서요. 제가 느끼기엔 그래요. 믿음의 분량도 마찬가지예요. 어떤 사람은 믿음이 크고, 어떤 사람은 믿음이 작은 게 아니라 그냥 제 생각과 형제님 생각이 다른 거예요. 저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이 그래서 그런 거지, 형제님 생각이 저의 마음과 다르다고 해서 틀리거나 작은 믿음인 게 아닌 것 같아요.”(후략)



교수님의 성품에 어울리는 말씀이라 놀랍지 않았다. 다만 정말 예의를 갖춰 말씀을 하셔서 조금 민망했다. 20대 한창때 왕성한 기력을 주체하지 못해 부린 객기이니, 이 글을 읽는 독자 분들이나 이 교수님 모두 용서해주셨으면 좋겠다. 다시 목사님의 예화로 돌아와서, 이 교수님 예화의 피날레는 방금까지 했던 이야기로 장식됐다. 책을 통해서와 육성을 통해 들었던 이야기는, 꽤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동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릴 적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른 점은, 믿음은 각자에게 주신 것이니 누가 더 큰가를 비교하지 말고, 내게 허락하신 믿음의 분량을 잘 지켜나가자는 것.



여전히 부족하고 갈길 또한 멀지만 노력하고 있다. 앞서 글의 서두에도 밝혔듯이, 요즘은 참된 감사가 무엇일지 생각할 때가 잦고, 또, 그 연장선으로 아주 작은 것이라도 감사할 거리를 찾으려 애쓰고 있다.



하물며 정히 감사할 거리가 떠오르지 않을 땐, 즐겁게 시청하는 TV 프로그램으로도 감사해 보려고 하고 있다.



앞으로 내 삶에 좀 더 명확한 감사의 고백이 넘쳐나길 소망한다. 이를 테면, 코로나19의 종식, 가족들과 지인들의 건강, 교회 출석 및 예배의 회복, 만남과 교제의 자유 회복 그 외 많은 것들이 주님의 선하심으로 이뤄질 것을 믿으며 기다린다. 비록 육체적으로나 심적으로나 힘들 때가 찾아오긴 하지만 이겨낼 힘 달라고 기도드려 본다.



본문은 분당 한울교회 김성국 담임목사님 주일 설교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본문 이미지는 “Pixabay”에서 인용하였으며 “cc0 Licence”임을 밝힙니다.

Photo by Herbanu on Pixabay  

매거진의 이전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