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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VEOFTEARS Dec 03. 2020

두 번의 선택과 두 가지 거저 주어진 것

장애인도 딱 한 번 살아간다



Photo by Jon Tyson on Unsplash



첫 번째 선택

지금으로부터 꽤나 오래전이었던 2006년의 가을. 나는 우연한 기회에 한 여인을 만났다. 그녀는 누가 봐도 훌륭한 내면의 소유자였다. 강한 인내심과 배려, 따뜻함까지 많은 걸 갖췄다. 게다가 예쁜 건 덤이다~ㅋ 



만나는 동안엔 세상은 온통 유희로 물들어 지금 생각해도 눈코 뜰새 없는 빡빡한 일정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단 1그램의 피로조차 느끼지 못했던 시간들… 그녀와 함께가 아니었다면 하지 못했을 수많은 경험들을 했다. 그것들은 어느새 촘촘히 가슴에 새겨져서 때때로 만질 수도 있는 기억이 됐다. 켜켜이 쌓여 쌓을 곳 없는 기억들은 감사로 바뀌었고, 그 감사는 나아가 다른 무엇으로 변했다. 



때문에 그녀에게 전달할 ‘어떤 이야기’가 필요했다. 어쭙잖은 미사여구들이 가득한 말들 대신 오롯이 전할 나의 이야기 말이다. 그런데 실은 그런 생각 자체가 욕심이다. 왜냐하면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어느 누구보다 부족한 존재인 것은 자명한 사실이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심이었으며 또한 절실했기에 이전 같으면 무조건 피하려 들었겠지만 그땐 아니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말을 해야만 하는 그때가 왔는데, 심지어 그때가 전부인데 도무지 말할 여건이 안 됐던 것이다. 결국 아무런 말도 꺼내보지 못하고 멀리 떠나보내고 말았다. 



물론, 당시에 계획했던 대로 술술 풀려 투박하게나마 하려던 이야기를 온전히 했다고 해서 원하는 결과(?)로 이어졌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아니, 분명 바람과는 정반대의 상황이 됐을 것이다. 또 결정적으로 그녀는 영원히 나와 함께할 여력이 없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모르게 한 것이 오히려 현명했는지도 모르겠다. 



두 번째 선택

2006년보단 시간이 꽤 흐른 어느 날이었다. 당시에 나는 오래 품어왔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하고 있던 차였다. 그래서 다른 글을 통해서도 몇 번 소개한 바 있는 후배 T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후배에게 조언을 구한다는 것이 면(面)이 서지 않는 노릇이긴 해도 그만큼 경청을 잘하는 이를 본 적이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여느 사람들 같으면 청자의 포지션을 자처하면, 그때부터는 둘도 없는 분석가가 되기 마련이다. 더불어 화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따발총과 같은 충고 세례가 쏟아지기 쉽다. 한데 이 녀석은 당최 그러질 않는다. 잘 듣고 새겼다가 상대를 높이면서도 할 말은 하는 그런 진중한 자세를 가졌다. 가끔은 이 녀석이 동생인지 형인지 착각이 들 정도다. 이런 연유로 그와의 관계가 돈독한 것 아닌가 싶다. 



어쨌든 더 이상 꿈을 꿈으로 두지 않고, 현실화시키기 위한 내 의지를 다 듣고 나더니 그는 신중히 입을 뗐다. “형, 형이 지금 상황에서 하실 수 있는 건 두 가지예요. 지금 해 보는 것과 나중에 하는 거죠, 어떤 쪽을 선택하시든 상관은 없어요. 전 비난하지도 않을 거고요. 형의 선택이니까요. 하지만 분명히 이 점은 있어요. 나중은 없어요. 아니, 나중도 있을 순 있겠지요. 한데 그땐 형의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그의 말에는 하나도 틀림이 없었다. 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도울 테니 꿈을 펼쳐 보라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그러나 이런 무조건 적이고 열렬한 지지 속에서도 결국 내 선택은 다음으로 미루는 것이었다. 그것이 최선이었다.



이제껏 언급한 전혀 다른 두 가지 일에 대한 선택에서 공통점을 찾으셨는지 궁금하다. 그건 바로 다음으로 미루는 것이다. 이쯤 해서 변명을 하나 얹으려 한다. 다시는 못 볼지 모를 좋은 사람을 그냥 보내는 것도, 생각만 해도 설레던 어떤 꿈을 미지의 시간으로 미루는 것도 결국엔 다 나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고자 하는 선택을 했을 때 드러날 결과와 책임져야 할 것들의 엄중함을 잘 알아서 지레 피했던 것이다. 어찌 보면 한없이 연약했던 나였기에 미리 차단하려 애썼던 건 아닐까 싶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고작 어제 일인 듯 생생한 이유는 아마도 아쉬움 때문이리라. 허나 내가 선택한 일이니 후회는 없다.



이처럼 선택은 언제나 이렇게 졸졸 쫓아다닌다. 심지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데에 대한 선택도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고 누군가는 말하고, 또 놀자고 하는 게임 속에서도 이지선다와 사지선다, 혹은 그 이상 중에서 하나를 택해야 한다. 그리고 아이러니한 측면은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옵션 없이 거저 주어지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것. 



그 첫 번째는 다름 아닌 장애다. 단연코 장애를 선택한 기억은 내겐 없다. 나는 물론이거니와 내 형제, 내 부모도 그러지 않으셨다. 만일 장애 유무를 선택할 수 있다면 기필코 장애를 피하려 들 것이다. 많은 책을 통해 극복이라는 단어와 함께 장애가 자신의 강점이 된 이유와 그것을 뛰어넘어 어드벤티지, 즉 장점이라고 말하는 경우를 보셨으리라 생각한다. 나 역시 그런 게 전무한 건 아니다. 다른 이들보다 내가 믿는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하게 된 것은 장애를 가짐으로써 유일하게 얻은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나는 불행할 때보다 행복할 때가 많다. 허나 그것 외에는 장애를 가져 얻는 장점은 어디에도 없다. 



분명히 밝히건대 장애가 본인에게 주는 장점이 있다고 여기시는 분들의 생각까지 판단하거나 정죄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장애인 분들이 이야기하는 주된 주제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본다거나 뛰어넘고 극복했다거나 하는 이야기들인데 적어도 난 그렇지 않다. 장애를 뛰어넘는 건 세상에 없고, 그저 장애에 인이 배겨 대수롭지 않게 되는 것뿐이다. 



그 대수롭지 않다는 것도 늘 그러느냐! 그렇지 않다. 때때로 본인의 한계를 목도할 때나 이유 없이 우울할 때는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왜 많은 경우에 주위 사람들이 힘겨워하거나 슬퍼할 때 감정을 공유하지 않나. 감정은 장애 유무를 따지지 않는다. 그런데 종종 망각하고 내뱉는 한 마디는 뭔가?! 의연하지 못하다는 질책 아니던가. 앞서 밝힌 과거에 겪은 선택의 순간에서 내가 우유부단할 수밖에 없던 이유도 9할 이상이 장애 때문에 비롯된 망설임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런 와중에 코로나19는 나뿐 아니라 모두의 선택을 막아버렸다. 모든 인류의 감정선이 코로나 블루(우울)를 넘어 레드(분노)에 이르게 될 때까지 참 많은 고생들이 있었다.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상이라고 착각했던 그간의 오만함. 바라기는 속히 우리의 일상이 복귀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전 글에서도 자주 사용했던 표현이긴 한데 코로나19가 장기화되는 가운데 가장 많이 떠올리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람의 계절이다. 자연의 계절은 불변하며 다시 찾아오나, 사람의 계절은 그렇지가 않다. 유한하고 제한적인 사람의 만남 가운데 가뜩이나 선택의 폭이 좁은 장애인 당사자로서 어떻게 해야 할는지 고민이 크다. 



예전과 같이 여인을 떠나보내고 꿈을 포기하는 그런 것은 아니나, 훗날엔 주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의 뜻과 삶을 쫓아 떠날 것은 분명하다. 그런 날이 오면, 또다시 모두가 원하는 바대로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의연함으로 꾹꾹 채워야 한다.  그래서 늘 안타깝다.



언제 잦아들지 모르는 상황 가운데 기다리는 일만이 답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의 생애가 한 번이듯 장애인도 딱 한 번 살아간다는 걸 고려하면 안타까움은 늘어 간다. 의외로 사람들이 잊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만일 늘 자각하고 있다면, 어떤 종류의 것이 됐든 선택을 강요하지도 않을 것이고, 쉽게 판단하지도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강조하고 싶다. 이 세상에서 한 번 사는 건 장애인도 마찬가지다.  



그간에 썼던 장애에 관한 글은 조금은 말만 번지르한 글인 것 같아서 이런 글도 남겨본다. 솔직히 이 글을 올리기까지 많은 고민과 수정이 있었음도 고백한다.




본문 이미지는 “Unsplash”에서 인용하였으며 “cc0 Licence”임을 밝힙니다.

Photo by Jon Tyso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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