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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VEOFTEARS Dec 01. 2020

다름을 인정하자

똑같지 않다, 결코.

Photo by David Knudsen on Unsplash



오랫동안 생각해 온 문제 하나가 있다. 그리고 이 문제는 많은 이들에게, 특히 장애인 동료들에겐 더더욱 할 수 없었던 이야기다. 지금부터 천천히 풀어보고자 한다. 



이 세상에서 ‘장애, 장애인’이라고 하면, 달리 생각할 필요도 없이 이런 것들로 대표될 것이다. 비뚤어진 몸, 어눌함, 어수룩함, 바보, 느림, 고집쟁이, 차별 등. 그리고 굳이 더 추가해 본다면, ‘함께하기 어려운 존재’ 정도 될 것이다. 



이런 글을 쓰는 필자 역시 장애인 당사자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게 곧, 내 얼굴에 침 뱉는 꼴임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쓰디쓴 현실을 인지하고 살아야 버틸 맷집도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지금부터 꼭 1년 전만 해도 필자는, 장애인은 차별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뭐, 지금도 사회는 ‘장애인은 나중에’ 같은 인식이 팽배한 건 사실이며, 이것은 반드시 사라져야 할 마인드라는 생각은 여전하다. 



가깝게는 조지 플로이드 씨의 안타까운 죽음이 곧, ‘블랙 라이브스 매터(Black Lives Matter)’ 운동으로 점화됐는데, 이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이 같은 잠재적이며 무조건적인 편견은 장애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근 40년 평생을 살아오면서 목이 터져라 외친 평등과 무차별을 위한 목소리가 과연 온당한 것인가 하는… 아니 그보다 그 포효를 듣는 청자가 정말 공감할 수 있을까 하는 일종의 회의 같은 것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인간은 어릴 적부터 무엇이든 학습하며 살아간다. 경험은 곧 배움이요, 배움은 가까운 미래나 먼 훗날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선택이 옳은지 그른지 여부를 판단하게 되는 기준이 된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함께 어울려야 한다고… 장애인도 다르지 않다고 말은 하는데, 정작 그렇게 말하는 화자인 우리가 그들의 진영 즉, 비장애인들의 진영 속에 들어가 몸소 알려주었는가 하는 자문을 먼저 해야 하는 건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로 관계의 시작은 인사부터라고 생각한다. 서로 어색하나마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물어야 자연스레 그다음 스텝으로 넘어간다. 한데 인사하는 것조차 쉽지만은 않다. 서양의 몇몇 국가에서는 길거리를 거닐다가도 낯선 이에게 인사하는 문화가 있다. 내가 먼저 인사했을 때 상대방 역시 반갑게 받아주면, 그냥 스치는 인연이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좋은 친구가 되는 시발점이 될 수도 있다. 



몇 년 전, 주말 오후에 집 앞 공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필자의 성격이 워낙 다이내믹해서 소심함과 대범함을 오가며, 현격한 온도 차이를 보이는데 그 날은 대범한 날이었나 보다. 공원을 산책하는 외국인을 보면, 일행이 없는 한 반드시 대화를 건넨다. 영어가 능통하기 때문이 아니다. 아주 기초적인 인사말로 시작해 대화를 이끌어가도 그들은 최대한 예의 있고, 자연스럽게 대처한다. 실제로 이렇게 해서 필자는 아주 좋은 친구를 얻었다. 만일 그날도 대부분의 날들처럼 ‘소심한 녀석 모드’로 일관했다면, 지금쯤 그와 나는 서로의 존재조차 모르는 채 살아갈 것이다.    



반면, 대부분의 한국 사회에선 어떤가. 요즘처럼 경쟁이 심화되는 이 시기에 거리를 지나며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손을 흔들고 고개를 숙일 일이 많지는 않지만, 그런 일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낯섦’에 낯설어하는 민족인 대한민국의 땅에서, 모르는 누군가에게 인사를 건넸다면 필시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인사에 돌아오는 반응은 과연 어떨까. 100%라고 단언은 하지 않겠지만, 십중팔구는 무반응이거나 혹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이상한 사람이라 여길지도 모른다. 어느 날 당신에게 누군가가 인사를 건넨다면, 당신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장애인의 차별을 논하면서 개개인의 관계를 논하는 것이 별로 적합해 보이지는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비장애인의 입장에서 보면, 장애인은 그야말로 신기한 존재로 여겨져서 흥미롭지만 쉽게 다가가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물론, 반대로 장애인의 입장에서도 너무 자신을 어려워하는 것 같으면, 다가가기 힘든 건 마찬가지다. 한없이 어색해서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만 같은 시간을 지나, 신뢰로 무장한 편한 사이가 되기까지는 굉장히 지난한 과정이 수반된다. 개개인의 관계부터 잘 풀려야 비로소 공동체를 운운할 수 있고, 함께하자고 외칠 수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할 사항이 있다. 현재,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장애인과 정상인으로 칭하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장애인과 비장애인으로 칭하자고 했고, 결국 이뤄졌다. 또 장애인의 등급을 매기는 것이, 마치 고기의 상품성을 논하는 것과 흡사하다고 해서 장애 등급을 경증과 중증으로 간소화하는 등 기준 역시 바꾸었다. 이 모든 것은 어찌 보면 성과이며 그렇게 될 때까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애써주신 모든 분들께 수고하셨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그러나 이제는 장애인의 권리만을 쟁취하기 위해 후진 기어 없는 맹목적 투쟁을 지양하고, 어떻게 하면 함께 어울려 살 수 있을지를 먼저 고민해야 할 시간이다. 비장애인들로 하여금 낯설고 두려웠던 마음이, 함께하는 것만으로 의미 있고, 괜찮은 일이라고 생각이 변할 수 있도록 우리가 세상에 자꾸 기회를 줘야 한다. 



아무리 원해서 장애인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고는 해도 그래서 좀 억울한 감은 없지 않아 있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 중 하나는, 평등과 함께 같은 그럴싸한 슬로건을 내밀어 세상 앞에 날카로운 치아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더불어 장애인 시위에서 자주 대두되는 저항과 투쟁이란 단어에만 너무 갇혀 있는 건 아닌지 수시로 점검해서 앞으로는 화합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또한, 우리는 비장애인과 정신은 다르지 않을지언정 신체는 다르다는 점 역시 인정해야 한다. 물색없이 ‘우리도 다르지 않다’는 외침은, 뻔히 보이는 겉모습의 차이로 인해 비장애인들이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다름을 인정하므로 다름을 뛰어넘자고 해 보는 것이 현명해 보인다. 



지인의 말씀으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그녀는, 장애인을 뜻하는 영문 표기인 Disabled Person(무능한 사람) 대신 Differently Person(다른 사람)으로 표기하자고 제안했다. 참 맞는 이야기다. 



다름은 잘못이 아니다. 그리고 같음이 무조건 옳은 것만도 아니다. 장애인 스스로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면, 매일 쳇바퀴 도는 삶만 살게 될지 모른다. 장애 유무를 떠나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 모두에게는 각자의 개성이 존재한다. 장애를 개성의 범주로 생각하기엔 어려울 수 있어도 한 번쯤은 노력해보자. 그런 노력들이 모이고 모이면, 함께하는 세상이라는 말은 더 이상 허공의 떠도는 메아리도 아니고, 유토피아도 아닌 현실이 될 것이다. 




본문 이미지는 “Unsplash”에서 인용하였으며 “cc0 Licence”임을 밝힙니다.

Photo by David Knudse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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