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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VEOFTEARS Sep 28. 2015

아이에 대한 내 생각

완성되지 않은 존재이긴 하나 그들을 무시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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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아기의 아이들은 본능에 충실하다. 배변을 해도 울고 배고파도 울고 아파도 울고 졸려도 울고 본인의 욕구가 충족이 되지 않아도 운다. 이렇듯 지나치리만큼 정확한 감정표현 때문에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입장에선 참 힘겨운 게 사실이다. 따라서 산후 우울증이 오는 것은 지극히도 당연하다. 부모도 어차피 하나의 인간이고 자신이 누려야 할 쉼이나 즐거움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 스트레스가 오게 되어 있다. 이런 힘듦과 어려움이 있지만 ‘그 나이 대의 아이들은 언제나 옳다.’라는 말이 있다. 이건 나 개인의 의견이 아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아이들은 미성숙하다는 이유로 개인의 욕구를 채우려 하긴 하지만 이것은 본인의 유희나 즐거움을 위한 것이 아닌 ‘생존’을 위함에서의 요구이다. 예컨대 아이가 용변을 실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울지 않고, 도리어 의젓하게 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아이는 장기적으로 방치된 용변 때문에 피부가 자칫 짓무를 수도 있고, 상황이 더 진행되면 피부병을 유발할 수도 있다.



또 하나, 만약 아이가 뜨거운 음식을 먹었는데 울지 않는다면, 아이의 연약한 피부는 데어 화상을 입어서 아플 수도 있다. 이처럼 아이의 욕구 표출인 울음은 겉으로 보기엔 저차원적인 것으로 보이나 사실 아이는 자신의 보호자인 부모에게 자신의 연약함을 울음으로 노출시켜 자신을 보호해 달라고 하는 것이다.



2



미운 일곱 살이란 표현이 있는데 사실 개인적인 경험에 바탕한 것이긴 하지만 아이의 자아는 만 4살 즈음에 1차적으로 생성된다고 본다. 물론 이는 개인의 차가 있을 수 있다. 이런 근거를 드는 이유는 내가 ‘그때의 기억이 나기 때문’이다. 기억이란 단순한 순간들의 나열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 그 당시에 아이가 사고(思考)할 수 있을 만큼의 생각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기억이 나는 것이다. (예 : 그때의 기억들이 좋았다. 혹은 싫다 같은) 자아는 판단할 수 있을 때 형성된다. 물론 1차적 자아형성은 완벽하지 않으므로 시시때때로 변할 수 있지만 그래도 이 때 좋은 순간을 만들어 주고, 또한 자신이 내 부모에게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을 심어 줘야 한다.



3



영아기 때부터 유아기 때까지 이야기한 것은 바로 청소년기를 말하고 싶어서이다. 청소년기는 유아기 때 상황에 따라 기분에 따라 바뀌는 것과 달리 크게 자신의 자아상이 변하는 시기이다. 이때는 다들 아는 것처럼 사춘기(思春期)가 오는데 사춘기는 문자 그대로 ‘자신의 인생에 봄이 오길 바라는 시기’이다. 굉장히 좋아 보이지만 어려운 시기이다. 자신의 인생에 봄이 오길 바라는 시기라고 말한 만큼 자신에 대해 많이 생각하는 때가 바로 이 때이다. 영아기와 유아기 때 혹은 그 후 사춘기가 오기 전까지 부모의 사랑을 받은 아이는 이 시기에도 슬기롭게 보낼 수 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렵다. 이 시기엔 대체로 어른을 모방하고 싶거나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게 되는데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게 되는가’에 대한 고민을 정말 빈번히 하게 된다. 밥을 먹거나 잠을 자는 시간보다 이 같은 고뇌를 하는 시간이 많아진다. 이런 고민을 내내 하다 보니 답은 풀리지 않고 답답하다. 답답하다고 느낀 아이는 자신이 해 나가는 일들과 생활에 염증을 느낀다. 맨날 책상 앞에서 하는 공부가 허무하고 싫어진다. 아이는 자신의 고민이 큼에도 불구하고 털어놓지 않는다. 소위 쪽팔려서다. 어른이 되고 싶고 아이인 척 하기 싫은, 즉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하고 싶은데 누군가에게 이 사실을 말하는 건 죽기보다 싫다.



그러다가 자신의 무능함을 탓하고 수없이 울기도 한다. 낙엽만 보고도 울음이 나는 시기이다. 저 낙엽 신세가 나와 같다고 느낀다. 그러다 큰 결심이 서서 부모님에게 이야기한다. 잘 받아 주면 좋은데 대개의 부모는 자신이 겪었던 지난날을 잊고 별 것 아닌 일로 치부하게 마련이다. 부모 입장에선 당연하다. 부모는 그보다 더 힘든 일을 해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때문에 그깟 아이들의 장난(?)보단 다른 데에 신경이 쏠린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같은 반 B군 보다는 우리 아이가 더 잘 나가야 하고, 남들이 보기에 떳떳해야 한다. 그렇다 보니 “네가 그런 거 고민할 때야. 쓸데없는 소리 말고 공부나 해! 엄마 친구 아무개는 전교 1등이란다. 뭐가 부족해서 너는.”



아이의 입장에선 혹 떼려다 혹 붙인 셈이다. 소위 꼰대한테도 듣던 이야길 우리 부모한테도 듣다니 우리 부모도 똑같다고 여길 수도 있다. 자식을 위한 최대의 충언이 자식의 입장에선 똑같은 망언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아이는 부모에게 등을 돌리고 아무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단 맘에 어긋난다. 어긋나기 시작하니 무서울 게 없고 어른들의 자유분방한 행동이 그들(아이)에게는 유토피아이며 천국이다. 장소 구애받지 않는 흡연과 음주, 부모의 눈치를 보지 않는 행동들은 아이들의 선망의 대상이다.



또래 아이들 역시 비슷한 생각을 갖기 때문에 동질감이 진하게 묻어난다. 때문에 인생의 참 위로자는 친구이며, 친구는 둘도 없는 존재다. 그런 존재가 옆에서 어른들의 전유물인 무언가를 하고 있다면, 자신도 해 보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이치다. 어른의 것이라서 해보고 싶은 것도 있지만, 하지 않으면 왠지 쪽팔리고, 또한 아무 말없이 하는 것이 이제껏 그게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준 친구에 대한 보답이라 생각해서 하게 된다. 이 같은 그릇 된 동고동락(同苦同樂)은 정말 큰 뿌듯함과 만족감을 선사한다.



흡연과 음주, 폭행과 섹스 같은 어른들의 문화가 잘못된 것임을 알지만,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이 어려운 게 아니다. 그들의 방패막이는 언제나, “다들 그렇게 사는데 뭐.” 이것이며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거슬러 올라가 보면 대부분 어른들이 자신에 대해 무관심했던 것 대한 반항심이나 혹은 자신의 처지를 부정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이처럼 아이들은 관심을 먹고 산다. 이건 비단 아이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 전체와 동물들도 같다. 예를 들어 사람이 왜 옷을 사 입나 자기만족도 있지만 십중팔구 타인의 이목 때문이다. 비싼 메이커가 각광받는 것은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 함이며 타인으로 하여금 박수받고 칭송받으려는 심리가 있다. 아이들끼리도 마찬가지다. 있어 보이고 싶고 우러러 보게 만들고 싶다. 때문에 어른의 전유물(아이에겐 일탈)도 그 또래 내에선 경쟁이 붙는다.



예를 들어 한 친구가 담배를 물고 소위 간지 나게 피우고 있다. 옆에서 보는 다른 아이가 그를 보고 자극을 받아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인다. 흡연이 처음인 녀석은 가까스로 불을 붙였다. 그런데 한 모금 빨자 콜록콜록 거 린다. 그러자 간지 나게 피웠던 친구는 그에게 조롱하듯 말한다. 



“아. 병신”



담배 초보인 아이는 그 말에 자극받는다. 그러고 어느 날은 담배 흡연 양에 대해 논쟁이 붙는다. 경쟁을 위한 논쟁이다. 3갑이네 4갑이네 운운하면서. 음주도 마찬가지고 이제는 원 나잇 스탠드마저도 경쟁의 시대다.



사실 학창시절 내 친구는 어느 날 기숙사 선생님들 몰래 나가서 술을 먹었다고 자랑하듯 이야기했다. 그래서 양을 물었더니 맥주는 드럼통 하나 소주는 두 병이라고 하며 속 쓰려 죽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웃긴 건 그의 얼굴에 미소가 옅게 번져 있었다는 것. 그때의 난 쿨 한 척 했지만 사실 한편으론 그게 어른스러운 것이라 생각도 정말 잠시 했었다.



우리는 이 같은 사회 흐름에 반성하며 개탄해야 하고 기도해야 한다. 어른들의 따가운 질책이 먼저가 아니라 어른들이 아이들에 대한 관심 없음을 인정하고 개선해야 한다. 흡연하고 술을 하는 친구들에게 무조건 막을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 공감하며, 동시에 위로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정말 필요할 때는 그것이 왜 나쁜지 상세히 그리고 천천히 알려주는 지혜가 필요하다.



청소년들 역시 자아가 완성되지 않은 존재이긴 하나 그들을 무시해선 안 된다. 그들이 성인이 되고 장년이 되면 무분별한 어른이 되고 만다. 그리 된다면 그 잘못은 그렇게 자란 아이들의 탓이 아닌 선대(先代)의 잘못일 것이다. 아이는 어른이 가르치는 대로 자라지 않는다. 아이는 어른의 거울이다. 어른들이 하는 대로 보고 배운다.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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