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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사랑 Jun 10. 2024

드라마 쓰는 러너입니다. (12)

런태기와 글태기의 상관관계.

런태기와 글태기의 상관관계.



런태기가 먼저 찾아왔던 것일까? 글태기가 먼저 찾아왔던 것일까? 잘은 모르겠다. 하여간 확실한 건 둘 다 나를 짧게 스쳐지나갔었다는 것.


여기서 잠깐 런태기와 글태기가 뭔지 모르는 분들이 계실까봐 설명 짧게 하자면 런태기란 러닝 권태기, 글태기란 글쓰기 권태기의 내 멋대로 줄임말이다.


아, 생각해보면 글태기가 먼저 찾아왔었던 것 같다. 어렴풋이 기억을 더듬어보니 그래도 러닝은 작년 12월 초까지 하프 마라톤을 준비하면서 쉬지 않고 부지런히 달렸다. 12월 말까지도 춥지만 방한용품을 이것저것 사서 ‘이 날씨에도 내가 뛸 수 있다니!’라고 스스로에게 연신 감탄해가며 야외 러닝을 지속했으니까.


그런데 이후 1월부터 본격적으로 날이 더 추워지면서, 뛰기 전 워밍업이 더 길게 필요해지면서, 점점 몸보다는 마음이 더 움츠러 들기 시작했다. 


‘뛰어야 되는데?’라는 마음이 들자마자 ‘오늘 바깥 온도가 몇 도지?’라는 생각이 자동으로 떠올랐고, 나날이 야외 온도가 낮아져가면서 ‘오늘은 어제보다 더 춥네.’ ‘와... 오늘은 역대급이네?’ ‘헐. 오늘도 어제만큼 춥잖아?’ 이런 생각을 하는 날들이 잦아졌다. 원래도 지루함을 잘 못 견뎌서 혼자 하는 러닝을 싫어했던 내가 헬스장 트레드밀이 잘 맞을 리도 없었다. 


그래서 ‘날이 조금만 더 풀리면’, 혹은 ‘내일 이시간보다 좀 더 따뜻한 시간에’ 뛰자고 스스로를 다독이기 시작했고, 그러다보니 가끔씩 큰 맘 먹고 뛸 때면 이전보다 훨씬 더 숨이 차고 다리가 빠르게 삐걱거렸다. 전형적인 악순환의 굴레. 뛰는 텀이 길어지다 보니, 뛸 때마다 고통은 더욱 배가됐다. 


그러므로 런태기의 시작은 추위 때문이었다고 쉽게 단언할 수 있는데, 글태기는 무엇 때문에 찾아왔던 것일까? 


글태기는 작년 10월 말, 내 인생의 첫 마라톤에 대한 소회를 기록한 뒤 에세이를 업로드하지 않았으므로 조금 더 일찍 찾아온 셈이다. 








여기까지 쓰고 한참을 쉬었다. 아, 벌써 쓰기 싫다. 


사실 아직 글태기 극복이 완전히 안 된 상태라는 것을 밝혀 둔다. 


그런데도 그냥 이전처럼 매끄럽게 잘 써 보려는 욕심을 누르고, 그냥 ‘ 되는대로 에세이’를 마무리 짓고 올리는 데에서 오늘 작업의 의의를 찾고 싶기 때문에 글을 더 가다듬지 않고 솔직하고 빠르게 그냥 써갈겨보기로 하겠다.


사실 내 글태기의 근본 원인은 이것이다.


‘더 잘 해 보고자 하는 마음.’


처음 에세이를 쓸 때만 해도 이것은 드라마라는 본업에도 멀어져 글 자체를 쓰는 기쁨을 되찾기 위한 시도에 불과했기에 부담감이 전혀 없었다. 새로운 일에 도전한다는 설렘만이 가득했다.


그런데 연재가 거듭되면서 이상하게 내 안에 작은 강박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지난 번 것보다 더 재밌게 쓰고 싶다.’ ‘아니면 적어도 지난 번 것만큼은 재밌게 쓰고 싶다.’ 


취미로 시작한 일에서 ‘퀄리티’를 따지기 시작하자 이것은 금세 가뜩이나 드라마 때문에 빠듯한 내 삶에서 ‘도피처’가 아니라 ‘새로운 노동현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쓰고 싶다’는 마음이 ‘써야 한다’는 마음으로 바뀌었고, 에세이를 써봤자 돈이 벌리는 것도 아닌데 그 강박은 ‘무시해버리면 간단한 문제’가 되었다. 즉 에세이를 쓸 아무런 동력을 발견해지 못했다는 이야기. 에세이는 ‘즐거움’이 원천 100%의 동력이었으므로 즐거움을 상실하자 다른 것은 무엇도 동력이 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실 내 허접한 러닝 에세이를 재미있게 계속 구독해주던 우리 러닝방 사람들이 ‘다음 편이 왜 안 올라오냐’고 애정어린 성화들을 보낼 때에도, 면구스러운 마음은 있었지만 ‘지금은 도저히 쓸 여력이 되지 않는다. 당분간은 쓰기 힘들 것 같다.’며 회피하기만 했다. 내 마음 속에서 ‘스트레스만 받는데 그걸 굳이 왜 써야할까’에 대한 답이 새로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도저히 연재를 재개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왜 갑자기 글태기 극복도 아직 안 된 주제에 다시 이렇게 엉망인 글을 쓰고 있냐고 하면, 나는 ‘잘 해야 한다’는 마음 때문에 좋아하는 것들을 서서히 잃어버리는 나를 극복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최근 본업인 드라마 쓰기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차기작을 써야하는데 도저히 ‘전작보다 더 나은 차기작’을 어떻게 써야할지 방법을 모르겠어서, 무척 괴로웠다. 


‘전작보다 더 나은 차기작’에 집착하면 할수록, 도대체 내가 전작은 어떻게 썼을까 하는 의구심만 새록새록 올라오고 전작보다 더 나은 차기작 아이템은 쉬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건 이래서 안 될 것 같고, 저건 저래서 안 될 것 같고.


정말이지 아이템 찾기가 너무 힘들어서 ‘나 이대로 차기작도 못 쓰고 입봉 하자마자 은퇴를 해야하는 건가?’하며 두려움에 압도되어있던 와중에 깨달았다.


내 마음의 고통의 원인이 ‘내가 아닌 남을 만족시키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는 걸. 


내가 생각해오던 아이템들은, 내 기호와 내 즐거움은 전혀 반영하지 않고 ‘남’만 신경 쓰고 있었는데 나는 ‘남’이 아니어서 ‘남’을 속속들이 온전히 알 수가 없었다. 즉 ‘남’만 생각하면서 ‘이걸 좋아할래나...?’ 더듬더듬, 코끼리 뒷다리 만지기를 해가며 의혹 속에 간신히 작품을 완성하고 나서도, 나는 결코 내 작품을 온전히 사랑할 수가 없고 심지어는 남들조차! 사랑해 줄지 아닐지 알 수 없다는 것. 


나는 영원히 손에 쥘 수 없는 것을 쫓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100%의 확신이 생기지 않는 것은 당연한 문제. 


우스운 것은 내가 가장 친한 작가의 프로필 배경 화면이 항상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면 나라도 즐겨야지.’라는 문구였다는 것이다.


나의 긴 방황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나자 새삼 그 언니의 카카오톡 프로필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됐다. 


그 이전에 내가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허상이었고, 나의 경험이 아닌 남의 경험이었다. 








깨달음은 이후로 내 삶에 연쇄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는데, 일단 내가 에세이를 그토록 쓰기 싫었던 이유도 순식간에 알게 됐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에세이를 쓰고 연재하는 과정이 아니라 ‘결과’에만 집중하기 시작했다. 


에세이를 처음에 쓰기로 결심하고, 소재를 생각하고 첫 편을 업로드했을 때의 기쁨, 독자들이 보내주던 피드백, 이런 소소한 귀중한 즐거움들을 다 까먹어버리고 ‘왜 구독자가 더 늘지 않을까?’, ‘돈도 안 되는데 이거 굳이 해야 되나?’, ‘에세이를 쓸 시간에 다른 걸 해야 하는 거 아닐까?’, ‘내가 생각보다 에세이를 못 써서 반응이 크게 안 오나?’, ‘에세이를 잘 쓰려면 여기서 노력을 좀 더 해야 하는 걸까?’ ...그렇다면 하기 싫다.


하지만 오늘의 내가 달라진 게 있다면, 오늘 내가 이 에세이를 쓰는 건 그저 소중한 내 두 명의 독자를 위해서다.


얼마전 나와 콩국수를 먹으러 먼 길을 함께 뛰었던 우리 방 마더케레사(?) 케라님이 잊지도 않고 별 재미도 없는 내 에세이를 독촉해주었기 때문에, 나는 케라님에게 흔쾌히 기쁜 마음으로 ‘이번 주 안에 에세이를 써서 올리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리고 사실 밍키오빠가 중간중간 잊지도 않고 각설이처럼 때만 되면 ‘에세이 다음편 언제 올라오냐’고 꾸준히 나를 채근해 주었기에, 이따금은 그 채근이 부담이 되면서도 늘 말로 표현하지 못할 고마움이 있었다. 


케라님과 에세이를 올리기로 약속한 이번 주의 마지막 날, 즉 일요일이 다가오자 나는 또 어김없이 에세이를 쓰기가 약간 괴롭고 귀찮아졌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에세이를 잘 쓰고자 하는 마음이 없기에 그저 딱 하나의 보상, ‘케라님과 밍키오빠의 작은 미소’ 단 한가지를 위해서 이 글을 쓰기로 마음 먹었다. 대신, 잘 쓰려고 하지 말고, 그냥 되는 대로 런태기와 글태기에 에 대해서 마구 지껄여보자, 라고 생각하면서.


사실 그걸 위해서 이 에세이를 써보는 경험은 나 자신에게도 좋은 선물이 될 것 같았다.


나는 ‘시도하는 모든 걸 다 잘 하는 사람’이 아니라 ‘좋아하는 걸 오래 좋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더 이상 나보다 나를 바라보는 타인들을 중시하며 내 즐거움을 하나 둘 짓밟아 없애는 잔인한 사람이 스스로에게 되고 싶지 않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이 에세이를 퇴고도 하지 않고 올리면서 스스로에게 화해 신청을 하고 싶었다.


‘너는 잘하지 않아도 괜찮아.’

‘너는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너는 너만을 위해서 네가 좋아하는 일들을 해도 돼.’


이전과는 다른, 정돈도 되지 않은 에세이를 올릴 생각을 하면 계속해서 마음 한 켠이 뻐근하고 부끄럽다. 


하지만 나는 그 고통과 부끄러움의 정체가 뭔지 이제 안다.


그건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다. 


그 마음을 온전히 내 삶에서 내다버릴 수는 없지만, 내가 적어도 더 소중히 여기고 싶은 것은, ‘미숙함까지도 포함해서, 나의 모든 경험들을 온전히 즐기는 마음’이다. 


런태기를 맞은 나도 글태기를 맞은 나도 다 괜찮다고, 그럴 수 있다고, 스스로를 수 없이 다독이면서. 오늘의 퇴고 없는 에세이 끝. 부끄럽지만 부끄럽지 않다. 


삶은 원래 부끄러움 투성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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