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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사랑 Aug 07. 2023

드라마 쓰는 러너입니다. (03)

콩국수 먹다가 러닝크루 부운영자 된 썰 푼다.

첫 참석 이후로 일주일에 한두 번을 꼬박 나가 뛰며 조금씩 우리 런방의 분위기에 익숙해졌다. 우리 방은 새벽이나 밤이나 밤낮없이 나가 뛰는 밍키 방장을 필두로, 러닝에 진심인 멤버들이 꽤 많아서 ‘00마라톤 신청 하신 분?’ 같은 러닝 관련 정보나... ‘오늘 바람이 좋은데요? 뛰기 너무 좋을 것 같아요.’, ‘약한 비예보가 있어서 저녁에 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같은 날씨 정보 공유가 단톡방 대화 지분의 80%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밍키 방장이 올린 사진 한 장이 대화의 흐름을 뒤집었다.



‘콩국수가 간절히 생각나는 날씨라..ㅋㅋ’


앞서 한창 진행되고 있던 모닝런(우리 방에서 새벽 러닝을 이르는 말) 관련 대화는 저혈압인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해서 대충 스캔하던 찰나에, 매우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콩국수 사진만큼은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나는 가던 발을, 아니, 가던 눈을 멈추고(?)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와.. 대박 미쳤네요. 모닝런이 아니라 콩국수를 부러워하고 앉아있는...’


다행히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와~ 진짜 맛있어 보이네요.’

‘오! 저도 최근에 콩국수 맛있는 집 다녀왔었어요 00회관이었나? 거기 진짜 맛있었어요.’

‘콩국수는 양재에 임00가 진짜 맛있는데!’


콩국수 맛집 추천...?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나도 부릉부릉 시동을 더 세게 걸었다.


‘아 양재 임00? 알죠알죠 미쳤죠 거기. 저 여의도 00집도 진짜 좋아하는데 거긴 비빔국수+콩국수 조합이 진짜 미쳤구, 양재 임00주는 그냥 콩국수 퀄리티가 1등이죠...’


갑자기 급발진이 걸린 내 진심 어린 콩국수 앓이에 사람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내 진심 어린 임00 콩국수 예찬을 듣고 있던 한 회원이 자기는 양재동에 2년여를 살았는데도 거기 콩국수를 한 번도 안 먹어봤다는 고해성사(?)를 했고, 그 말에 몹시 흥분한 나는 일면식 하나 없는 그녀를 매우 다그치기 시작했다.


‘왜... 도대체 왜 안 가보신...?’


그녀는 심지어 내게 사과를 하기에 이르렀고...


‘죄송합니다... 조만간 꼭 가볼게요...’


밍키 방장이 웃으며 말했다.


‘sue님 콩국수에 진심 ㅋㅋ’


그날은 우리 런방에서 나의 정체가 탄로 난 날이었다.






그렇다. 나는 콩국수에 진심이다. 아니, 사실 먹을 거에 진심이다. 고백하건대 나는 살면서 주위 인물 중 맛집 정보 보유량에 있어서 뒤쳐진 적이 별로 없다.


어렸을 때부터 워낙 맛있는 음식이 좋았다. 한량으로 살던 20대 시절에는 식도락이 내 인생 최대의 낙이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요즘은 맛있는 걸 하도 쥐 잡듯이 뒤지고 다니면서 많이 먹어봐서 사실 에지간히 새롭고 충격적으로 맛있지 않으면 그때 그 시절만큼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하지만... 그리고 트렌디한 식당을 죄다 찾아다니기에는 시간과 체력이 허락하지 않아 넘쳐나는 맛집 데이터 아카이빙에 다소 소홀해졌지만, 부자는 망해도 3년을 간다고 내가 20대 때 먹어보고 다닌 식도락 데이터만으로도 어디 가서 먹보스 역할을 담당하는데 솔직히 부족함은 별로 없다.


아, 그리고 ‘맛집 추천해 주고 제발 가보라고 강요하기병’과 갑자기 찾아오는 ‘00가 미친 듯이  먹고싶어병’은 아마 타고나길 식도락가로 태어난 내가 평생 가지고 가야 할 기저질환(?) 같은 거라고도 생각한다.


아무튼 다시 우리 방 이야기로 돌아가서, 밍키 방장은 그날 이후로 며칠간 콩국수 급성 어택이 찾아와 닉네임도 콩국sue로 바꾸고, 콩국수 얘기만 나오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나를 지켜보다 결국 ‘임00 콩국수 번개’ 추진 명령을 내리고 말았으니, 그 콩국수벙은 우리 방 유사 이래 운동벙 외 최초의 친목 번개였다.






날씨가 조금은 꿀꿀했던 6월의 초입에, 콩국수를 먹기 위해 양재동 콩국수집에 모인 멤버는 총 다섯이었다. 밍키 방장과, 나와, 1편에 등장했던 굥님과, 그즈음 막 알게 된 레이라는 회원과, 지금은 우리 방을 나간 한 추억의 남자 회원.


운동복이 아닌 평상복 차림으로는 처음 만나는 자리였는데 서로를 본 각자의 소감은 대충 비슷했다. ‘길에서 봤으면 절대 못 알아봤다.’ 아, 그날도 운동복을 입고 콩국수를 먹으러 온 (자칭 타칭 운동에 미친 남자인) 밍키 방장 빼고.


조금 어색할 법했지만 우린 이미 몇 차례의 러닝벙에서 안면을 튼 나름 핵심멤버들이었고, 다들 또 한 친화력 하는지라 딱히 뭐 어색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콩국수를 먹으며 한참 동안이나 각자 이 국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름 진지하게 시식 평을 주고받았는데 아마 누가 봤으면 ‘런방’이 아닌 ‘콩국수를사랑하는사람들방’에서 온 줄 알았을 거다.


그리고 콩국수 얘기 외에는, 우리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솔직히 별로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요악하자면 분위기가 꽤 좋았던 느낌은 남아있다. 그래서 우리는 콩국수를 후루룩 뚝딱 맛있게 먹어치우고 자연스럽게 러닝을 가려다가, 논의 끝에 방향을 선회해 2차로 맥주를 먹으러 갔다.


맥주집에서는 우리 런방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밍키 방장이 어떻게 이 방을 발견했는지, 어떻게 이 방의 운영진이 되었는지(알고 보니 그가 만든 방이 아니었다! 그게 더 놀라웠다. 누가 봐도 이 런방에서 태어난 사람 같았는데...), 다 죽어가던 이 방이 그의 공로로 어떻게 차츰차츰 활성화가 되었는지 등 등.


그러다 어느 순간 밍키 방장이 방도 슬슬 활성화가 되고 있으니 이젠 자기 외에 운영진이 몇 명 더 필요하다고 운을 띄웠다. 안 그래도 그의 어깨가 조금 무거워 보이긴 하던 차였다. 혼자서 100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을 관리 통제하려면 다소 벅차지 않을까? 혼자 애쓰다가 번아웃이 오면 안 될 텐데. 이전의 망해버린 런모임 시절 트라우마가 있던 나는, 또다시 ‘이 방 못 잃어’병에 시동이 걸렸다. 정말로 이 방만큼은 절대 잃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찾아낸 소중한 러닝 친구들이 있는 방인데...


머릿속에서 번개처럼 계산기를 돌린 나는 문득 맞은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부운영자로 굥님 어때요? 솔직히 하려면 굥님이 해야지. 러닝도 열심히 나가고 친화력도 완전 무슨 마을회관 지박령 급인데.” 굥님은 나한테 특유의 싹싹한 눈웃음을 지으며 ‘죽을래요?’라는 시그널을 보냈고 나는 그 시그널을 당연히 눈치챘지만 잔인하게 휙 고개를 돌려 모른 척했다. 활달하고 싹싹한 그녀가 이 방의 운영자로 너무도 적합하단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기에. 누군가 밍키 방장을 도와 운영진을 해야 한다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했으면 했다.


그런데 그때 밍키 방장이 내 팔꿈치를 툭 툭 두 번 쳤다. 내가 고개를 돌리자 그가 내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둘이 좀 해요. sue님이랑, 굥님이랑. 같이.”


내가 지금 무슨 소릴 들은 거지,라는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내가? 나보고 설마 지금 이 거대한(?) 러닝클럽의... 부운영자를 하라고? 나 엄청 바쁘고, 솔직히 책임감도 그다지 없는 인간인데?’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데굴데굴 굴리고 있는 틈에... 밍키 방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난 둘이 같이 해줬으면 좋겠어. 사실 그렇게 쭉 생각해 왔던 거예요. 지금 갑자기 생각하고 말하는 게 아니라.”


내가 말했던가?


나는 밍키 방장을 좋아한다.


솔직히 우리 방에 들어와서 얼마간 지내보면, 누구나 밍키 방장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 그의 성실함이나, 카리스마나, 이타심 같은 것들이 지금의 활발하고 자유로우면서도 매너 좋은 우리 방 분위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한테 아주 약하다.


그래서 그의 말이 농담이 아닌 것을 알게 되자, 그리고 심지어는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제안도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자... 그의 부탁을 거절하기가 정말로 어려워졌다. 그래도 마지막 남은 내 양심을 쥐어짜 내서 양심 고백 했다.


“아니 전... 솔직히 밍키님처럼 자주 뛰지도 못하고... 실력도 한참 모자라고... 이런 거 해 본 적이 없어서 도움이 안 될 거예요.”


이건 사양하기 위한 밑밥이 아니라, 고생하는 밍키 방장을 내가 능력이 있다면 돕고 싶긴 한데 도움이 전혀 되지 않을 것 같아서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그런 나한테 밍키 방장이 한 말은 이랬다.


“그냥 두 사람 다 다른 건 아무것도 안 해도 되고, 지금처럼 사람들이랑 수다 잘 떨면서 방 분위기 밝게 해 주고, 내가 필요할 때 의논 상대만 해주면 돼요. 나머지는 다 내가 할게요.”


솔직히 에세이다 보니까 좀 멋있게 각색을 하긴 했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각색이라기보다는 ‘요약’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굥님과 내가 하도 방에서 입을 잘 털어서(?) 우리가 대화에 끼고 안 끼고에 따라 방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다고. 그러니 친근하고 재미있는 방 분위기를 위해서 우리가 아주 조금만 더 책임감을 갖고 ‘역할’을 해 달라고. 큰 거 바라지는 않으니까, 지금 하던 대로만 활발하게 지내면서 적응에 어려워하는 회원들 보이면 조금씩 더 챙겨달라는 것이었다.


“솔직히 그것도 굥님이랑 콩님이 이미 하고 있던 거잖아요?”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굥님과 나는 ‘이를 어쩔 거냐’며 동시에 고민에 휩싸였다. 방에서 먹을 거 얘기 나왔을 때 너무 나댔나... 런방에서 먹는 걸로 수다 떨다가 운영자로 스카웃이 되다니... 물론 그즈음 뛰기도 열심히 뛰긴 했다. 오랜만에 같이 뛸 사람들이 떼거지로 생겼다는 게 너무 신이 나서. 밍키님도 좋고, 굥님도 좋고, 일주일에 거의 50k씩 뛰는 것 같은 열정 괴물 제이님도 좋고, 느린 페이스로 같이 뛰면서 수다 떨어주는 펀런주의자 레이님도 좋고, 매주 새롭게 만나게 되는 러닝 친구들이 다 다 좋아서. 그래도 운영진까지 되고 싶었던 건 절대 아니었는데.


나와 똑같은 마음을 굥님도 품고 있는 듯이 보였다. 나처럼 수다에 미친(?) 것뿐이지 그녀도 누군가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일에는 전혀 관심도 열의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수다도 떨고 러닝도 할 수 있게 방을 만들어준 사람이 밍키 방장인데. 그런 그가 우리한테 부탁을 했는데. ‘죄송합니다. 저희는 여태까지처럼 즐기기만 잘 즐겨볼게요. 책임과 의무는 다른 사람이 좀 졌으면 좋겠어요...’라는 뻔뻔한 대답을, 둘 다 차마 내놓을 수가 없었다.


“진짜 여태까지 우리가 하던 대로만 하면 되는 거... 맞을까요...?”

“에이씨 모르겠다. 뭐 그럼 되는 거겠죠, 뭐... 아니면 튀면(?) 되고!”


결국 우리는 그날 버스에서 마음을 모았다. 힘이 닿는데 까지는, 어떻게 저떻게 힘을 모아 밍키 방장을 도와보기로.


하지만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버스에서 내려 혼자 돌아오는 길에는... 갑자기 생겨버린 막중한 책임감에,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떠올라 맛있게 먹은 콩국수가 다 얹힐 것 같았다.


'나, 잘할 수 있을까?'

'내가 좋아하는 밍키님과 굥님을 실망시키지 않고, 계속 즐겁게 달릴 수 있을까?'


...물론, 해 보기 전에는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고민은 딱 그날 밤까지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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