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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사랑 Aug 21. 2023

드라마 쓰는 러너입니다. (05)

우리 러닝크루 멤버를 소개합니다 - 마성의 페브리

내가 우리 런방에 들어와 막 활동을 시작했을 무렵, 방에는 조금 특이하다 싶은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우리 모임은 기본적으로 모두가 서로에게 존칭을 쓰며 지내는데 ‘페브리’라는 닉네임을 가진 여자는 채팅방에서 종종 무례하다 싶은 반말을 썼다.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페브리 : 이따 어디에서 만나요?

제모씨 : 농구장에서 뵙죠.

페브리 : ㅇㅋ 방금 끝났어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왜 저 사람 혼자만 채팅방에서 저렇게 당당하게(?) 혹은 불손하게 반말모드를 가동 중인건지 궁금했다. 우리 방은 러닝벙에서 자주 만나서 서로 간에 친분이 어느 정도 쌓인 사이라 해도 굳이 말을 놓고 지내지 않는 분위기인데 페브리는 친분관계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반말과 존댓말을 거침없이 섞어 쓰곤 해서 뭔가 상당히 이질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심지어 그런 건 나만 신경 쓰는 듯했고, 아무도 그런 그녀의 무례함에 태클을 걸지 않는 데다가 외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막내여동생을 대하듯 귀엽고 살뜰하게 그녀를 챙겨주는 느낌이어서 그것도 희한했다.


‘나이가 엄청나게 어린가?’ 

‘얼마나 어리기에...? 설마 뭐 미성년자?’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아무한테나 반말을 섞어 쓰는데 왜 저걸 다들 가만 두고 보지?’ 

‘......마성의 여자인가?’ 


이따금 페브리가 채팅방에 출몰할 때마다 위와 같은 생각들을 하며, 호기심을 잔뜩 불러일으키는 그녀를 실제로 얼른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런 그녀를 내가 처음 만난 것은 6월의 어느 날, 밍키 방장이 올린 등산 번개에서였다. 


우리 방은 기본적으로 러닝 위주의 벙이 열리지만 등산에도 진심인 밍키 방장이 주최하는 등산 벙이 때때로 올라오기도 하는데, 그날이 그런 날이었다. 간만에 이른 아침 청계천 산행이 하고 싶어진 나는 당일 아침 번개에 참석 버튼을 눌렀고, 참석자 확인을 해보니 밍키 방장, 밍키 방장의 지인, 그리고 페브리까지 네 명이 그날의 최종 산행 멤버였다. 그걸 보고서 택시를 타고 가며 또 생각을 했다. 


‘페브리는 어떤 여자일까?’ 

‘나는 무례하고 제멋대로인 사람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 페브리가 자신의 마성(?)을 믿고 무례하고 불손하게 나를 대하면 어떡하지?’ 


얼마 후 택시에서 내린 나는, 밍키 방장과 그 옆에서 활짝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고 있는 한 여자를 발견하고 그녀가 페브리임을 직감했다. 입이 아주 크고, 그 큰 입의 입꼬리가 아주 시원한 형태로 쫘악 위로 올라가는 매력적인 미소를 가진 그녀는 한국인과 다른 피부색깔과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어 보자마자 한눈에 ‘외국인’ 임을 알 수 있었다.


‘마성의 페브리가 아니라 한국말이 서툰 외국인이었구나...’


그러고 보니, 그녀의 모든 언행이 이해가 되었다. 다소 투박한 한국말, 이따금 섞어 쓰곤 하는 영어, 수시로 스위칭되는 반말과 존댓말모드. 오히려 파악하고 나니 ‘바보같이,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단서가 풍부했으므로 내 자신의 짧은 식견이 부끄러워졌다. 그런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나도 아무렇지 않게 활짝 웃으며 성큼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오! 페브리님이구나. 맞죠?’


우리는 활짝 웃으며 인사를 주고받고, 함께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러닝을 할 때도 수다를 많이 떠는 편인데 그 힘든 러닝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수다를 떨려하는 이유는 러닝이 기본적으로 힘들고 지루한 운동이기 때문이다. 물론 고강도 러닝일 때에는 입을 열 정신 따위 없으므로 숨만 겨우 쉬면서 뛰지만 당장 죽을 정도로 힘들지 않을 때는 늘 옆에서 달리는 사람과 수다를 떨면서(=나와 수다를 떨어달라고 강요하면서) 지루한 장거리를 완주해 낸다. 


등산은 더욱더 수다를 떨기에 좋다. 가파른 구간을 <뛰면서> 올라가지만 않는다면, 육체와 정신이 털리기 전까지는 충분히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호젓한 풍경과 옆 사람과의 수다를 즐기며 오르는 게 내 산행 스타일이다. 그런 내게 페브리는 최적의 짝이었다. 그녀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그녀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내게 질리지도 않고 성실히 온갖 대답을 해주며, 나보다 더 활기차게 수다 산행을 즐겼다.


그런 페브리와 대화를 하며 알아낸 사실들은, 그녀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왔다는 것, 현재 한국에서 지낸 지는 8개월 정도가 되었는데 올해 11월에 비자가 만료된다는 것, 그런데 8개월밖에 머무르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한국어를 유창하게 잘하는 이유는 이미 몇 년 전 한국의 한 대학교에서 석사 코스를 마쳤기 때문이고, 그때는 주로 영어를 사용하며 유학생활을 해 이번에는 한국어 어학연수 겸 한국을 즐기기 위해 다시 왔다는 것, 그리고 K-POP을 좋아한다는 것 등이다.


사실 케이팝을 좋아하는 거야 요즘 K-아이돌 위상이 워낙 대단하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산을 타면서 갑자기 ‘어디로 가야 하죠 아저씨~’(김연우의 이별택시 중)를 부르고, 나는 제목도 잘 모르는 임재범의 노래를 불러 대는 페브리는 알면 알수록 나보다 더 한국인스러웠다. 


뿐만 아니라 청계산역 앞을 지나가면서 ‘나 저 집 곤드레밥 너무 좋아해’라고 말해서 내 귀를 의심하게 만들고(외국인이... 곤드레밥을... 그것도 청계산 밑에 있는 곤드레밥집을 콕 찍어서 좋아한다고?), 등산을 마친 후 산 아래 밥집에 파전을 먹으러 가서는 ‘회기동 파전마을’에서 파전 먹은 이야기를 한참 동안이나 술술 풀어내는 그녀는 슬슬 ‘이거 위장 인도네시아인 아냐?’ 싶을 정도로 나보다 더 토종(?) 한국인 같았다.


얘기를 하다 보니 자꾸 나의 선입견과 편견이 무차별적으로 폭로되는 느낌인데 사실 그렇다. 난 선입견과 편견에 사로잡힌 인간이 되는 걸 경계하려고 노력하는 인간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노력일 뿐... 겸허히, 그리고 담대히 인정하건대 난 선입견과 편견 덩어리다.


부끄럽지만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동남아로 포괄적으로 묶어서 생각해 버리곤 하는 저 아래쪽 여러 나라의 국민들이 함부로 나보다 더 가난할 것이라고 습관적으로 섣부른 판단을 하곤 한다. 판단이라고 부르기에도 부끄러울 정도로 거의 무의식적인 사고 흐름이다. 그리고 그들은 대개 수줍음을 많이 타거나, 혹은 위축된 존재일 것이라고 제 멋대로 상상한다. 또한 그들은 나보다 지식이 부족할 것이며 한국에는 주로 아이돌 덕질을 위해서, 혹은 돈을 벌기 위해서 왔을 것이라고 손쉽고, 폭력적인 예측을 한다. 


페브리는 그중 단 하나도 들어맞지 않는 사람이다.


그녀 본가의 재력(?)과 그녀 자신의 재정상태에 대해서 본인의 입으로 들은 바가 없으므로 잘 모르지만 일단 주어진 단서들을 가지고 대충 유추를 해보자면 나보다는 부자 같다. 나는 이따금 외국에 유학 혹은 어학연수를 하러 훌쩍 떠나고 싶지만 재정적 상황도 빠듯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현재를 투자할 여력이 없기에 그 소망을 현실화할 수 없는데 페브리는 그것들을 해내고 있다. 그리고 얼핏 봐도 한국에서 저렇게 맛집을 쏘다니고 매일매일 뽀로로처럼 신나게 놀려면 용돈이 꽤 풍족하게 뒷받침되어야 가능할 텐데... 용돈인지 본인이 모아둔 돈일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쓰는데 그닥 부족함은 없어 보인다.


심지어 등산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만난 굴다리 작은 시장에서 페브리는 구경만 슬쩍하고 지나가려는 우리를 불러 세워 컵에 잔뜩 담아 파는 체리를 1인당 하나씩 쏘기까지 했다. 



이쯤 되면 재정적으로 부자인 건지 마음이 부자인 건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둘 중에 하나는 뭐든 나보다 부자라는 거다. 페브리가 우리 중에 나이도 제일 어렸는데...


거기다 흔히 서양인들이 한국인들을 볼 때에 한국인들이 수줍음을 많이 타고 내성적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나 역시 무의식 중에 동남아 사람들을 볼 때에 그런 편견이 발동되고 있었다는 걸, 페브리를 만나면서 알 수 있었다. 페브리는 내가 만난 동남아인뿐만이 아니라 한국인, 서양인을 다 통 털어서 제일 천방지축이고 시끄럽고 흥이 많다. 그게 놀라웠다. 그녀는 전 세계 어디에 갖다 놔도 위축되고 말이 없어지는 타입의 사람은 아닐 거다 아마.


그뿐인가? 나는 학사 학위밖에 없는데 페브리는 우리나라 명문대 석사 학위도 갖고 있고, 나는 한국어밖에 못 하는데 그녀는 인도네시아어, 영어, 한국어 3개 국어를 한다. 


내가 우리나라보다 조금 더 동쪽, 그리고 남쪽 지방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지고 있던 선입견과 편견은 페브리를 통해 낱낱이 확인되었으며 결국 파편화되어 부서졌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말’이 아닌 자신의 ‘존재’ 자체로 알려주었기에 페브리는 무섭고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선생님이 아니라 사랑스럽고 고마운 선생님이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하나도 알려주지 않았더라도 페브리는 우리 모두에게 아주 특별한 친구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데, 8월 15일에 우리나라의 광복절을 축하하며 8.15k런 인증사진을 올려준 다정한 그녀는 그날 우리 모두를 감동의 도가니탕에 빠트려 이틀 뒤 우리가 인도네시아 독립기념일을 축하하며 질세라 8.17k런을 뛰게 해 준 특별한 추억을 선물해주기도 했다. 누가 살면서 자신과는 상관도 없었던 어떤 먼 나라의 독립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그 마음을 보여주고 싶어 이 더운 땡볕에 나가서 뛰는 미친 짓을 할 수 있겠는가?


이쯤 되면 단 한 가지 선입견만큼은 선입견이 아니었음을, 사실이었음을 시인해야 한다는 생각마저 든다. 100명의 인원 중 99명이 한국인인 이 모임에서 누구에게나 친근하게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 스스럼없이 다가가 자신의 매력을 알려주는 페브리는 내 예상 그대로 ‘마성의 여자’였음을. 모두가 페브리를 귀여운 막냇동생을 대하듯 다정하고 살뜰하게 대해주는 데는, 그녀의 국적보다 그녀의 ‘마성’이 단단히 한몫한 것이었음을.


이쯤에서 내려보는 오늘의 에세이 결론 : 


선입견과 편견은 대단히 위험하고, 마성은......... 대단히 중요하다.





Dear. 마성의 당신.

사랑스러운 페브리, 우리와 같이 뛰는 친구가 되어줘서 고마워 :)

앞으로도 한국에서 머무르는 짧고도 긴 시간 동안 즐겁게 자주 같이 달리자. 

페브리의 꿋꿋한 마이페이스를 응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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