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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flower is not a flower. 채식주의자와 퍽 잘 어울리는 노래를 시작으로, 독후감을 시작한다. 채식주의자는 묘한 악명과 달리 이해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은 소설이었다. 책이 출간되었을 당시 난해하다는 평이 있었던 것은 당시 사회적으로 '페미니즘feminism'이 대두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에코 페미니즘ecofeminism'을 기반한다. 에코 페미니즘이란 환경에 가해지는 폭력 및 착취가 여성을 향한 억압과 닮아있다는 시점에서 시작한 사상이다. 에코 페미니즘을 알고 있고 또 이해하고 있다면, 이 소설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다.
* 책 내용과 관련된 스포일러가 다소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 챕터인 '채식주의자'는 영혜의 남편 시점으로 진행된다. 별다르지 않고, 특별하지도 않은 남자는 역시 남다를 것 없는 영혜를 만나 결혼한다. 남자는 영혜를 '아내감'으로 고른 이유가 세상에서 제일 평범하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실은 쉽게 복종하며 뚜렷한 주관이 없는 여자를 찾고 있었을 뿐이다. 눈에 튀지 않고, 인내하는 것에 능하고, 자신의 주관을 죽이는 것에 수치를 느끼지 않는 여자. 남자에게 영혜는 그런 존재였다. 다만 다른 여자들과 달리 브래지어만큼은 참기 어려워 한다는 것이 유일한, 남자가 생각하는 영혜의 단점이었다. 첫 챕터에서는 은근한 스릴러적 긴장감이 있다. 영혜의 꿈에 대한 묘사, 영혜와 남자의 부부 동반 회식, 영혜가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참지 못하고 결국 실낱 같이 쥐고 있었던 무언가를 툭 놓아버리는 것까지. 물리적인 폭력은 영혜와 가족이 부딪히는 장면에서만 존재하지만 이 소설은 전체적으로 '여성'에게만 가해지는, 공기처럼 당연하고 호흡처럼 자연스러워 긴밀하고 예민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폭력과 혐오가 나열돼 있다. 가령 남자가 영혜를 당연히 제 소유물처럼 여기고 다루는 것이나 딸이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부父가 망설임 없이 손을 올리는 것, 남자가 영혜의 언니인 인혜에게 성적 긴장감을 느끼는 것 등. 2019년이 된 지금도 콕 짚어 나무라지 않으면 잘못되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할 법한 설정이었으니, 출간되었던 당시 책에 담긴 뜻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넘쳐났던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그런 사회 속에서 났고, 자랐고, 그러면서 느꼈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단 것을, 우리는 바꿔놓아야 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남자는, 인혜의 말마따나 너무나도 간단하게 영혜를 포기했다. 나름대로 노력한 듯도 싶었으나, 그런 걸 과연 노력이라고 볼 수 있을까? 남자는 영혜를 걱정하지 않았다. 조금은 그런 마음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느끼기로 그는 영혜를 성가셔하거나 혐오하고 있었다. 영혜가 그런 꿈을 꾼 것, 갑자기 육식을 거부하게 된 근원 같은 건 남자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평범하게 남들은 다 하는, 이상해 보이지도 특별해 보이지도 않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흔히 그려지는 가정의 남편 노릇이 하고 싶었던 것 뿐이다. 당연한 일이 아닌 일을 당연하게 해내고 불만 한 마디 않는, 내킬 때면 얌전히 몸을 내주는 노예와 같은 아내를 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남자는 영혜를 부양하지 않았다. 그럴 생각도 없었을 것이다. 그에겐 영혜에게 써줄 마음도, 배려심도, 헌신도 없다. 남자는 영혜를 사랑하지 않는다.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손 떼버린 일은 그간 그가 영혜를 어떤 존재로 여기고 있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남편'이라는 웃기지도 않은 호칭을 가진 남자에 대한 서술만으로도 영혜의 '이상 행동'은 어렵지 않게 설명된다.
영혜의 채식은 사실 채식이 아닌 '육식 거부'로 설명될 수 있다. 영혜는 신념으로서 육식을 거부한 것이 아니다. 더 본능적인 것이다. 하지만 신념으로서 채식을 지향하는 사람들과 같이 정신적으로 연결돼 있다. 영혜는 '꿈'을 꾼다. 어느날 갑자기. 그 꿈으로 인해 가리는 것 없이 싹싹하고 푸짐한 식성을 가지고 있던 그는 한순간에 육식을 거부하게 된다. 심지어는 어류까지도. 꿈을 꾸고 난 후 영혜의 행동은 '갑작스러운 일'로 표현되고 있지만 이 세상에 '갑자기'란 없다. 늘 영혜의 마음 구석에, 지워버리고 싶고 차라리 모른 체 하는 것이 낫다고 취급되었던 생각들이 있었을 것이다. 가부장적이며 폭력적인 아버지의 밑에서 자란, 의젓하며 순종적인 언니와 남동생 사이의 귀염성 없고 입 발린 말을 못하는 둘째 딸이 아무런 문제 없이 커주길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다. 영혜는 짐승보다 무엇이 나았을까? 외모가 멋드러졌다며 칭찬 받던 개가 단 한 번 제 손을 물었단 이유로, 그렇게 하면 살이 야들야들해진단 이유로, 정을 주며 키웠던 개를 오토바이에 매달아 끌고 다녔던 아버지. 개는 입에 거품이 물리고 꼴이 너절해질 때까지 바닥에 끌려다녔다. 영혜는 고작 고기를 먹지 않는단 이유만으로 서른이 넘은 나이에도 제 남편과 언니-동생 부부가 보는 앞에서 뺨을 맞았다. 산에서 인혜와 길을 잃었던 어린 시절엔 차라리 이대로 도망치는 것이 낫겠다 생각했을 정도로 아버지에게 학대 당했다. 영혜는 어쩌면 느꼈던 것이다. 짐승과 자신이 별반 다를 것 없다는 사실을. 꿈 속에서 뻘건 핏물을 홍수처럼 흘리며 매달려있던 꼴들은 사실 고깃덩어리가 아니라 영혜 자신일지 몰랐다. 자신의 위로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수 없이 쌓여왔을 폭력과 혐오들은 기어코 영혜를 비틀리게 만든 것이다. 영혜가 꿈에서 본 것은, 꿈으로부터 투영시킨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었다.
─ 손목은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아픈 건 가슴이야. 뭔가가 명치에 걸려 있어. 그게 뭔지 몰라. 언제나 그게 거기 멈춰 있어. 이젠 브러지어를 하지 않아도 덩어리가 느껴져. 아무리 길게 숨을 내쉬어도 가슴이 시원하지 않아. 어떤 고함이, 울부짖음이 겹겹이 뭉쳐져, 거기 박혀 있어. 고기 때문이야.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어. 그 목숨들이 고스란히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거야. 틀림없어. 피와 살은 모두 소화돼 몸 구석구석으로 흩어지고, 찌꺼기는 배설됐지만, 목숨들만은 끈질기게 명치에 달라붙어 있는 거야. 한 번만, 단 한 번만 크게 소리치고 싶어. 캄캄한 창밖으로 달려나가고 싶어. 그러면 이 덩어리가 몸 밖으로 뛰쳐나갈까. 그럴 수 있을까. . . . 아무도 날 도울 수 없어. 아무도 날 살릴 수 없어. 아무도 날 숨쉬게 할 수 없어.
두번째 챕터는 영혜의 형부이자 인혜의 남편인 '그'의 시점이다. '그'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그'는 신부神父라고 칭해졌을 만큼 올곧은 사람이었다. 정해진 선을 빗겨나가는 건 인생의 길이 아니라고 믿었던 사람이다. 어찌보면 믿었다기보단,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등장하는 대부분의 남성들을 역하게 묘사해놓은 '채식주의자'에서 그나마 '예술적으로' 묘사되었던 '그'. 혹자는 작가가 '그'의 비틀린 예술적 욕심이나 형부와 처제의 불미스런 관계가 불필요하게 느껴질만큼 섬세하고 그럴듯하게 그려진 것은 역설적으로 '그'를 욕되게 보이기 위함이라고 했다. 용서 받을 수 없고 품었단 것만으로도 지탄 받아 마땅한 감정과 충동을 '그'는 몇 번이고 제어하고 억누르려고 했으나 본능은 그런 식으로 제어되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거절당할 것이라 생각하여 뒷걸음질 치고 있던 그의 혼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되려 손을 내밀어오는 듯한 영혜로 인해 살아난다. 현실을 자각하며 받아들이는 동안 미미하게 꺼져가고 있던 불씨 역시 화마가 되어 그를 에운다. 제 모든 것이 불길에 타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그는 정신 없이 영혜에게 최초의 정열을 그려낸다. 결과는 당연하게도 파국.
형부와 처제라는 관계성으로 인해 그와 영혜의 행동이 때 묻어 보일 수도 있겠으나 그가 추구했던 것이 단순한 성욕이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그는 영혜에게서 줄곧 원해왔던 예술적인 무언가를 본 것이다. 확실한 이유도 없이 육식을 거부하며 나날이 말라가는 영혜의 신체에서, 인혜가 무심코 흘린 영혜 엉덩이 위의 몽고 반점에서, 모든 걸 통달한 듯 공허하고 건조한 눈빛에서, 군더더기 없는 말투에서,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목소리에서, 부끄럼을 모르는 태도에서. 그는 절대로 영혜를 사랑한 것이 아니다. 그저 영혜가 평생에 걸쳐 자신을 서서히 살해해온 타의적 괴로움으로 뒤틀려가는 모습에서 영감을 얻은 것 뿐이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영혜의 삶은 남성으로 인한 피와 얼룩으로 스산한데, 그 모습이 그에게는 예술적으로 다가왔다는 것이. 여자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남자에겐 성적이고, 끌림 있고, 어떻게 해보고 싶은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가 추구한 것이 단순히 성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해도 궁극적으로 그는 온 몸에 꽃을 얹고 있는 영혜에게 흥분했으며, 섹스했다. 생각과 의도는 행동만큼 중요하지 않다.
영혜가 제 몸의 꽃을 지우고 싶지 않아했던 이유는 아마 꽃에 둘러진 순간만큼은 자신이 짐승 같다거나, 짐승보다 못하단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영혜는 ─개인적인 견해로는─ 짐승이 꼭 제 모습 같아 육식을 거부했다. 종래에는 모든 음식을 마다하며 식물이, 나무가 되고 싶다고 말한 영혜는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육식에 대한 거부는 곧 자신의 존재에 대한 거부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영혜는 벗어나고 싶었던 거다. 착취 당하지 않고, 고깃덩어리를 꾸역꾸역 욱여넣지 않아도 되고, 어떤 것도 해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던 거다.
마지막 챕터인 '나무 불꽃'은 영혜의 언니인 인혜이자 '그녀'의 시점이다. 유연하고 능하게, 인내하고 또 인내하며 자신의 욕심과 의지 따위는 철저히 제거한 채 자리를 지키던 인혜는 영혜가 모를 이유로 무너져가는 것을 보며 이윽고 자신의 수면을 맞닥뜨리게 된다. 세 남매의 맏딸로서 폭군 같았던 아버지의 횡포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얌전히 아버지의 부름과 요구에 응하고, 정숙하고 조신했던 인혜는 그 여파로 성인이 된 후로도 끊임없이 인내하며 살아야만 했다. 스스로를 억누르고 주관을 죽이고 타인에게 거슬리는 언행은 삼가며 서글서글해 보이도록 웃을 줄 아는, 자신을 위한 것은 하나도 없이 거짓으로 점철된 삶을 이어간다. 인혜 역시 알고 있었다. 제 삶은 제 것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버릴 작정으로 올라갔던 밤중의 산에서 후련함을 느끼고, 그저 미쳐버린 것만 같았던 영혜를 차츰 이해하기 시작한다. 모두 영혜를 등졌으나 인혜만큼은 그럴 수 없다. 영혜나 '그'가 아니었다면 정상적인 궤도를 벗어나 끝 없이 헤매고 있었을 것은 자신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인혜가 영혜를 책임질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육식만 거부하던 영혜는 점점 입에 대지 않는 것이 늘어간다. 숨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영양소를 혈관으로 주입하는 것이 일상이다보니 남아나는 혈관이 없을 정도로, 영혜는 연명 당하고 있었다. 유년엔 착실한 맏딸로, 자라서는 착한 여자와 엄마로 착취 당하던 인혜가 영혜로부터 스스로를 보고, 그간 자신이 포기해왔던 것들을 마주하며 영혜와 비슷한 모양으로 받았던 억압을 생각하는 것은 가히 인상적이었다. 요즈음에 빗대어보자면 페미니즘을 외치며 행동하는 여성을 보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다 결국엔 그 뜻에 동의하게 되는 여성들의 물결과 내면의 거센 파도를 잘 다듬어진 한 편의 이야기로 지켜보는 것 같았다. 흐름의 중심이 영혜라면 주제와 의도를 관통하는 것은 인혜다. 영혜로 시작하여 상기시키고, 인혜로 알아채며 풀어낸다. 우리 여자들은 대부분이, 아니 사실은 빠짐없이, 모두가 영혜이고 인혜일 것이다.
─ 나는 이제 동물이 아니야 언니. 중대한 비밀을 털어놓는 듯, 아무도 없는 병실을 살피며 영혜는 말했다. 밥 같은 거 안 먹어도 돼. 살 수 있어. 햇빛만 있으면.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정말 나무라도 되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식물이 어떻게 말을 하니. 어떻게 생각을 해. 영혜는 눈을 빛냈다. 불가사의한 미소가 영혜의 얼굴을 환하게 밝혔다. 언니 말이 맞아…… 이제 곧, 말도 생각도 모두 사라질 거야. 금방이야. 영혜는 큭큭, 웃음을 터뜨리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정말 금방이야. 조금만 기다려, 언니.
제발 그만 해요. 그만 좀…… 그녀는 주사기를 든 수간호사의 손목을 움켜잡는다. 조용히, 자신의 품에서 영혜의 몸뚱이가 경련하는 것을 느낀다.
세면대 앞에서 얼굴을 씻으며, 그녀는 떨리는 입술로 바보같이,라고 되뇐다. 기껏 해칠 수 있는 건 네 몸이지. 네 뜻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게 그거지. 그런데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지.
에코 페미니즘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건 오래지 않다. 물은 지나갔으나 여전히 회자되고 있는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었다. 페미니즘이 수면 위로 올라오기 전의 것이었으니 당연하게도 책이 출시된 당시엔 난해하기 짝이 없는 작품으로 사람들에게 각인되었을 것이다. 채식주의자는 ‘에코 페미니즘’을 기반으로 한 소설이라는 해석이 있다. 에코 페미니즘이란, 생태학(ecology)와 페미니즘(feminism)의 합성어로 자연에 가해지는 폭력과 여성에게 가해지는 억압이 닮아 보인다는 시점에서 출발한 사상이다. 깊이 공감한다. 인간은 자연을 공공재로 취급하며, 공공재이기에 그를 아껴야 한다는 의식 따위는 전반적으로 부재하다. 언제든 있을 거라는 안일한 인식 위로는 게으름과 이기주의가 찌든 때처럼 끼어있다. 사람들은 대개 ‘내 것’이 아닌 ‘모두의 것’은 함부로 생각하며 다루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닳아 없어질 수도 있으며, 숨 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은 둘째의 것이다. 인간이 환경을 착취하는 모습과 사회가 ‘일반적으로’ 여성을 다루는 모습은 상당히 닮아있다. 단지 그 목적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언제든 제 마음이 내킬 때 손 대어도 되는 것, 영원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에 대한 망각, 대상은 숨 쉬고 있으나 마치 사물을 대하는 듯한 무정함까지. 페미니즘을 지향하는 사람들 중엔 채식을 겸하는 이들이 많다. 혐오의 기반은 결국 같고, 혐오로 인한 폭력의 행태는 틀림 없이 닮아있으며, 혐오는 혐오를 낳는다. 페미니즘을 생각하며 실현시키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생태주의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혐오로부터 기인된 폭력은 결이 꼭 같기 때문이다. 에코 페미니즘에 대해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치밀어오르는 분노와 끓은 가슴께를 가라앉히기 어려웠다. 그저 분리된 개인으로서 완연한 인간으로서 살아가고 싶다는 욕망이 여성을 투과했을 땐 욕심이 된다.
[나는 이제 동물이 아니야 언니. 밥 같은 거 안 먹어도 돼. 살 수 있어. 햇빛만 있으면.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정말 나무라도 되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식물이 어떻게 말을 하니. 어떻게 생각을 해. 영혜는 눈을 빛냈다. 불가사의한 미소가 영혜의 얼굴을 환하게 밝혔다. 언니 말이 맞아…… 이제 곧, 말도 생각도 모두 사라질 거야. 금방이야.]
이 모든 이야기에 동하지 않는다면,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면, 흔들림 없이 무감할 수 있다면, 그런, 모를 당신에게 부러움을 느낀다. 때론 모르는 게 약이 될 수도 있다. 적요함이 치열함보다 나을 때도 있다. 하지만 차츰 변해가는 ‘이런’ 세상에서 과연 그 모든 태도가 최선인 것인지에 대해선 반드시 고뇌해봐야 할 것이다. 그것이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의무이니까.
저의 해석이 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견해일 뿐입니다. :)
때문에 덧붙임이 아닌 반박은 원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