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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백수다방

야 비켜, 나도 이제부터

겸손 좀 해보자

by 조운생각

중간고사는 왜 있는 걸까? 뭐 한다고 중간에 고사를?

우리를 좌절의 구렁텅이에 집어넣고는 결국 ‘형편없음’이라는 빨간 도장이라도 찍고 싶었던 게냐!

흥. 그런 구린내 나는 음모에 넘어갈 내가 아니다!

나는 발랄해질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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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점짜리 수학시험지를 나풀거리면서도 난 당당하게 걸었다. (인문계 가면 되지 뭐)

다행히도 울 엄마 아빠는 내 시험성적에는 관심이 없으셨다. 엄마 입장 “건강만 해라” 아빠 입장 “네 이름이 뭐였더라?”


학교도 일찍 끝났겠다, 아무도 없는 집으로 냅다 달려와서 일단 밥부터 먹었다.

[무쇠 압력밥솥을 열고 어제저녁때부터 찬찬히 식혀둔 찬밥을 푼다. 냉장고에서 김치통을 꺼내와 국자로 국물을 퍼서 밥 위에 붓는다. 사정없이 비벼서 입에 욱여넣는다. 젓가락 따윈 취급하지 않는다. 오직 숟가락으로만 승부를 본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놀자!”

유유상종이랬다. 친구는 대답했다. “왜 이렇게 늦게 전화를 해! 빨리 나와”


오락실에서 몇 시간 신나게 놀고 난 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친구가 물었다.

“너 오늘 시험은 잘 봤냐?”


응? 오늘이 시험이었어? 아 맞다. 난 집중력이 좋아서 그런지 오락실에서 몸은 나왔으나 아직 정신은 그곳에서 빠져나오질 못했다.


“응, 잘 봤어”

“오늘 수학 있었잖아”

“응, 잘 봤어”

“이 새끼. 너 혹시 나 몰래 공부한 거 아냐?”

친구가 의심을 한다. 아니 될 말이다. 나는 그 의심을 일축해 버렸다.

“아니? 나 원래 수학 잘하잖아”

“하긴… 넌 좋겠다”

“별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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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릿속에 저런 대화를 나눴던 실제 기억이 존재한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다.

100점 만점에 12점이란 점수는 과연 어떤 자격을 부여하길래 저리도 당당했단 말인가?

저건 겸손도 아니고, 그렇다고 교만도 아니다. 교만할래도 어느 정도는 잘난 게 좀 있어야 먹힌다. 그렇다면 겸손은 어떠한가? 빵점을 맞아 놓고도 “하핫. 운이 좋았어요” 이러면 정신병원에서 환영한다는 문자가 날아온다. 교만이든 겸손이든 일단 자격이 필요하다.


<유퀴즈온더블럭>에 세계 최고의 비트박서 “윙”이 나왔다.

그가 누구인지 몰랐는데, 그거 보고 나서 윙의 영상을 죄다 찾아보게 되었다. 입으로 어떻게 저런 소리를 내지? 넋을 놓고 봤다. 윙이 군대 있을 때 병장 말년에 박보검 님과 병영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윙도 유명한 연예인을 보게 되어 신기하기도 하고 관심을 끌고 싶어서 자신의 비트박스를 보여주었고 이를 계기로 둘이 친분이 생겼다고 한다.

그때 박보검 님께서 윙에게 해주신 말씀이 있었다고 한다.

“얼마나 노력했을지 보인다. 자신감과 더불어 항상 겸손하시라”

(캬.. 난다요. 난다요. 빛이 난다요. 역시 보검님. 얼굴만 보배가 아니라 마음에서도 그저 빛)




세계에서 인정받는 최고가 된다는 느낌은 과연 어떤 걸까. 우월감을 느끼기도 하고, 좀 우쭐대고 싶기도 할 것 같다. 솔직히 잘난 체 조금은 하고 싶지 않을까? 인정 받고난 뒤의 자연스런 욕구다. 아니지. 그래도 사람이 겸손해야지. 교만해서 쓰나.

가만있자. 지금 내가 뭘 걱정하고 있는 거지?

내 시험지 어디 갔노?


겸손을 논하기 전에 먼저 내 시험지부터 확인해 보자. 겸손은 아주 중요한 덕목이긴 한데, 그래서 튼실하게 잘 뻗은 뒷다리를 보면서 ‘원래는 저기에 꼬리가 있었어’라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도 중요하긴 한데, 아직 개구리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겸손이건 교만이건 그걸 배울 수 있는 실질적인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올챙이는 열심히 꼬리 흔들어가며 일단 살아남아야 한다.


그래, 움직이자. 뭐라도 좀 하자. 성실하자. 엉망진창 글이라도 좋으니 일단 타자기부터 뚜드리자.

성장함에 따라 때로는 교만도 해보자. (아니 내가 교만해봐야 얼마나 교만하겠어! 뭐가 그리 잘났다고) 그리고 나보다 잘난 사람의 등장 앞에 오징어처럼 납작 엎드려도 보자. 쭈구리가 되자. 이 모든 과정을 겪은 뒤에 입을 벌리지 말고 말해보자. ‘난 아무것도 아니구나. 아직 멀었구나. 더 열심히 해야 하는구나.’ 그렇게 겸손을 배우게 되는 것 아닐까. 성취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게 아니지만 겸손도 마찬가지다. 성실함으로 작은 성공도 이뤄보고, 교만했다가 넘어져도 보고, 다시 일어설 줄 아는 끈기와 투지도 장착해 가면서 겸손을 익힐 수 있다.

쯧. 12점이 뭐냐 12점이. 공부 좀 해라 짜슥아! ㅠㅠ

자격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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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 아침부터 이 난리를 치며 타이핑 중이다.

내 꼬리… 말이 아니다.



#겸손 #올챙이시절 #개구리되기전 #성장통 #내꼬리어딨어 #오늘도헤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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