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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백수다방

넌 누구냐

설명이 필요하다

by 조운생각

나는 현대 미술관이 좋다.

고대와 중세의 미술은 어느 정도 짜여진 틀에서 안정적으로 그려지기 때문에 전문가가 아닌 내 입장에서는 다 비슷비슷해 보인다. 돈 많은 귀족 그림, 성경 그림, 천사 그림이 주를 이루다가 르네상스 이후로는 좀 더 사람 냄새나는 그림들로 바뀐다고 하지만 여전히 지루하다. 이미 정형화 된 해석이 존재하고 그것이 정답이라니까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면서 받아들여야 하는 입장이다.


그에 반해 현대 미술은 나에게 해석할 여지를 남겨주니 좀 더 참여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작품을 볼 때 좀 더 ‘싸우자’는 자세를 취하게 된다. <너 이눔시키 무슨 뜻이야>, <왜 이렇게 만들었는데>, 그러다가 종국엔 <지금 작가의 의도가 중요해? 내가 이렇게 해석하겠다는데>에 이른다.




스페인 빌바오에 있는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여러 작품들을 감상하며 감탄의 혀를 내두르고 있던 때였다. 한 그림이 강렬하게 눈에 꽂혔는데 그것을 보자마자 입에서 ‘풉’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캔버스는 빨간색 바탕이 칠해져 있는데 그 한가운데 “IN” 이라는 노란색 글씨가 입체적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넌 누구냐


우왓! 이건 ‘인’이라고 써놨지만 ‘아웃’이라고 읽어야겠는데?

저 발상(발칙한 상상)을 좀 보시게나. 본래 내면은 안에 있는 것이지만 그것을 보여주려면 밖으로 꺼내야 한다. 내면(IN)은 “나 내면이요!”하고 있는데 그것을 밖으로 꺼낸 이상 그것은 더 이상 내면에 머물러 있지 않다. 그렇다고 그것을 외면(OUT)이라 칭할 수도 없다. 본질상 내면이니까. 그렇다면 이건 뭐다? 네? 뭐라고요? 관람객들의 해석을 듣기 위해 수첩을 들고 귀를 쫑긋이고 있는 화가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참 재미지다 하면서 미술관을 나오는데 IN 그림으로 안경닦이 천을 만들어 팔길래 하나 사줬다. 그렇지. 돈도 벌어야 먹고살지.




나는 글을 쓰면서 독자에게 여지를 남기려 하지 않는 것 같다. 물 샐틈 없이 짜여진 스토리를 내놓으려 내 머리를 쥐어짠다. 물이 샌다 싶으면 그곳을 집중 수리하는데, 그러다 보면 저쪽에서 새고 있다. 그걸 몇 차례 반복하다 보면 ‘에라 모르겠다 그냥 마무리하자’가 된다. 어느 세월에 그걸 기승전에 결까지 만들어내나? 성격 급한 나로서는 빌드업이 어렵다. 풀어 설명하는 것이 읽는 독자한테나 쓰는 나한테나 고역이다. 그런데 그림은 그 전달 방식이 참 독특하다. 장면 하나를 보여줬을 뿐인데 관객들의 머릿속에 각자의 소설을 한 편 쓰게 만든다. 시의 영감을 주기도 하고, 수필의 소재도 준다. 아픈 날에 대한 공감도 있고, 존재에 대한 정의도 내린다. 글을 잘 쓰는 사람도 괴물 같지만 그림 한 장으로 수많은 이야기를 풀어놓는 사람들도 정상은 아니다(비범하다).


그림이나 배워볼까(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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