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이 위로가 되는 이유
박경리, <토지>의 서문 중
독자는 이 소설에서 울부짖음도, 통곡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소설일 따름, 허구일 뿐이라는 얘기다. 진실은 참으로 멀고 먼 곳에 있었으며 언어는 덧없는 허상이었을 뿐이라는 얘기다. 마찬가지로 진실은 내 심장 깊은 곳에 유폐되어 영원히 침묵한다는 얘기도 되겠다.
이 말을 들으니 안심된다.
최고의 지혜자로 꼽히는 솔로몬이 그의 노년에 한 말이 떠오른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것이 헛되다.”
인간이 지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명예, 권력, 부, 지혜를 가지고 인생을 살아본 결과로써 하는 말치고는 상당히 허무하게 들린다. 하지만 동의가 된다. 뭔가를 깊이 있게 공부하면 할수록 모르겠다는 것이 솔직한 학자들의 결론이 아니던가. 모른다라고 말하기까지 얼마나 숱한 도전과 실패, 경험과 자료들이 축적되었을지, 얼마나 많은 고심 끝에 정직을 위한 용기를 내었을지, 최고의 지혜를 가진 누군가가 말년에 인생에 대한 압축적인 정의를 내릴 때 그것이 '허무하다'면 그는 얼마나 많은 성공과 실패, 철학과 사유를 거쳐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을지. 누군가에게는 허무하게 들릴지 모르는 그 말이 나에겐 위로가 되기도 하고 그의 지난한 과정에 박수를 보내고 싶기도 하다.
그리하여 토지를 쓴 박경리 작가가 자신의 소설을 향해 ‘이것은 허구에 불과하다'는 말을 내뱉었을 때에는 그 안에 인간에 대한, 인생에 대한, 그 어리석음과 추함과, 그럼에도 살고자 하는 용기와 의지 같은 것들이 얼마나 사실적으로 생생하게, 촘촘하게 박혀있을지 더욱 기대하게 된다.
‘진실은 참으로 멀고 먼 곳에 있었으며 언어는 덧없는 허상이었을 뿐’이라는 말은 소설 안에서 인간에 대한 끈질긴 탐구, 내면에 대한 감찰, 그에 따른 고뇌가 즐비하며 그것을 자신의 언어로 최대한 풀어내려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봤다는 뜻이다.
다만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이 깨달은 진실이 수많은 단어들의 정렬로도 잘 드러나지 않고, 말로도 잘 표현되지 않고, 그저 진실의 온기 정도만 스치듯 전달할 수 있게 되다 보니 그것은 오히려 침묵에 가깝지 않을까 하여 겸허하게도 ‘덧없는 허상’이라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주어진 도구는 언어이기에 어떻게든 그것을 표현하고 전달하기 위해 작가는 글을 쓴다.
그 고민의 흔적을 따라가 보고 싶다. 그 의식의 흐름에 몸을 한 번 맡겨보고 싶다. 감추고 싶은 내 깊은 내면을 고발당하고 정죄당하고 싶다. 그것을 결국 알게 되었다는 도취된 자아에 흐느껴 보고 싶다. 나를 위로하며 현재의 나에게 면죄부를 주고 싶다. 모든 인간은 결국 그러한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