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클림트 <여인의 초상>
내 무릎에 작은 흉터가 있다. 아주 어릴 적, 그러니까 내가 6살쯤이었을까. 가족들과 어느 계곡에 놀러 갔을 때 얕은 물가에서 바닥에 손을 짚어가며 헤엄을 치고 놀다가 돌에 긁혀 난 상처 자국이다. 40년 가까이 지난 오늘까지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한동안 잊고 살다가 문득 무릎에 시선이 머물 때면 나는 그 계곡으로 소환되어 당시의 날씨와 시원한 물,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본 어른들과 그들의 대화가 떠오른다. 좋은 기억도 나쁜 기억도 아니건만 그날이 그토록 내 머릿속에 오래 남아 있는 이유는 어떤 ‘자국’과 함께 존재하기 때문인 듯하다. 흉터가 나에게 노래를 한 곡 추천해 준다. ‘부디 나를 잊지 말아요’.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구스타프 클림트가 그린 ‘여인의 초상’에는 숨겨진 비밀이 있다고 한다. 클림트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완성한 이 작품 속에는 짙은 초록색 바탕에 젊고 화사한 여인이 뭔가 말하고 싶어 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려져 있다. 그런데 그 그림에 X선 촬영을 해보니 캔버스 아래에 다른 여인의 초상을 그렸던 자국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그녀는 클림트가 사랑했던 여성이었고 그녀가 (어떤 이유였는지는 모르지만) 갑작스레 떠나버리자 그녀를 잊기 위해 화가는 그녀의 그림 위에 다른 여성으로 덧칠을 해버린 것이었다.
또 노래 가사가 떠오른다.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 그런데 정말 그럴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이 내 곁에 있다면 예전에 나와 함께 했던 사람에 대한 기억이 잊혀질 수 있을까. 그와 함께 갔던 장소는 여전히 그대로고 그와 나눴던 대화는 내 세포 속에 각인되어 있는데. 그때의 감정은 여전하여 잠시 감상에 빠질 때면 아직도 웃음이 나고, 때론 미안하기도 하고, 그때 들었던 노래를 다시 듣노라면 잊힌 줄 알았던 모든 기억들이 나를 그때로 데려가곤 하는데... 여기저기 자국들이 참 많이도 남아있고 그것들을 다 일일이 지우기도 어렵다.
사랑하는 여인을 앞에 두고 그 모습을 그릴 때 클림트의 마음은 어땠을까.
자기야, 이 포즈를 취해봐. 고개를 살짝만 이쪽으로. 오, 너무 이쁘다. 좋아 좋아. 움직이면 안 돼. 자기 지금 너무 사랑스러운데? 얼른 그려줄게! 자기의 아름다운 모습은 이 캔버스에 아주 오래도록 남아있을 거고, 그보다 더 오래 나와 대중의 마음속에 새겨질 거야.
그런 그녀를 잊기 위해서였을까. 그녀가 떠나버린 뒤 그림 위에 다른 모델로 덧칠해 그려버렸지만 클림트는 그 그림을 볼 때마다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이 아른거렸을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화사한 모델이 아닌, 그 심연에 자리 잡고 있는 사랑하는 여인이 입체적으로 떠올랐을 것이다. 어떻게든 지워보고 덮어보려 노력했지만 캔버스, 아니 클림트의 마음에는 진한 자국이 남아 있었다. 자신의 마음판과 같은 작품 앞에 서 있는 클림트의 마음을 생각하니 참 아련해진다. 그 여인은 누구였을까.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그림은 1997년 특별전을 준비하던 중 쥐도 새도 모르게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가 22년 만에 쥐와 새를 깜짝 놀래키며 다시 나타났다. 돌아온 그림에 모두들 박수와 환호를 보냈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천억 원의 가치를 하는 역대의 명작들 중 하나가 다시 돌아왔으니 인류를 위해서도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 작품을 아무도 모르게 훔쳐간 인간도 대단하지만, 그것을 또 아무도 모르게 돌려놓은 위인도 보통이 아니다. 영화 같은 사건을 두고 연일 기사가 터져 나왔으며 대중들의 관심은 뜨거웠다. 클림트의 표현기법과 색감에 대한 찬사가 이어졌고 작품의 가치는 더욱 높아졌다. 그러다 불현듯 번개처럼 대중의 뇌리를 가로지르며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이 소환되었고 모두들 돌연히 조용해졌다. 대중과는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잘 보이진 않지만 이곳을 향해 서있는 한 여인. 검은 모자와 스카프를 두른 채 우수에 찬 표정을 한 여인. 짙은 초록색 바탕에 가려져 눈을 찡그리고 봐도 잘 보이지 않는 그녀의 모습이 왠지 쓸쓸하면서도 무언가 간절해 보인다. 거리는 멀었지만 희미하게 보이는 수수께끼 같은 그녀가 누구인지 우리는 알 것만 같았다.
실체 없이 거의 자국만 남아 있는 듯한 그녀의 나지막한 읊조림이 들리는 듯하다.
‘부디 나를 잊지 말아요’
p.s. 클림트의 ‘여인의 초상’ 작품이 한국에 전시된다고 한다. 서울 강남에 소지한 마이아트뮤지엄에서 2025년 12/19부터 2026 3/22까지 ‘클림트와 리치오디의 기억: 이탈리아 리치오디 현대술관 컬렉션’이 열린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참조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