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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류장 Sep 02. 2018

하나의 잔이 되어

글쓰는 토요일

세상엔 수많은 잔이 있다.

시원한 물을 담는 물잔, 색색의 주스를 담는 주스잔, 둥그런 곡선미의 와인잔, 날렵하고 세련된 샴페인잔..

용도에 따라 빨대컵, 머그컵, 일회용 커피컵도 있고,

재료에 따라 유리컵, 도자기컵, 법랑컵, 플라스틱컵도 있다. 

수 만 수 천가지의 잔은 그 모양도 모두 다른데다, 담긴 것에 따라 그 역할도 다르다.


생수를 한 잔 가득 따라 놓은 지금 내 앞의 스테인리스 머그컵은 나와 함께 한 지가 벌써 10년 째인 오래된 잔이다. 표면의 커피 브랜드 로고는 슬슬 끝이 지워져 가고 있지만, 튼튼한 디자인의 고무 손잡이도, 보온 보냉이 확실한 컵의 기능도 여전히 새 것과 다름없다. 이 잔은 아마 앞으로도 오랜 시간 동안 시원한 주스를 마시고 싶을 때, 따뜻한 차를 오래 즐기고 싶을 때마다 나와 함께 할 것이다.


이 믿음직한 잔과 함께 해온 시간을 되돌이켜 보니 기특하기가 그지 없다. 

과연 나는 이 잔만큼 성실하게 제 역할을 하고 있는 지 생각해보게 된다. 


잔은 만든 이의 목적이 확실한 물건이다. 

잔을 디자인하고 만들며, 이 잔이 아름다우면서도 제 기능에 충실하기를 바랬을 것이다.

맛있는 음료를 담아 적절한 순간에 필요한 이들에게 사용되기를 바랬을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나라는 작은 잔이 신께서 만들어 주신 목적대로 아름답고 귀히 쓰여지기를 바라본다.

살아가면서 내 멋대로 쑤셔넣은 미운 것들은 씻어내고 

있는 그대로 깨끗이 나를 비워내 좋은 것을 담아내고 되고 싶다. 


그리하여 필요한 순간에, 좋은 목적에 쓰일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는 믿음직한 잔이 되고 싶다. 


투박하지만 깨질 염려 없이 언제든 찾게 되는 나의 스테인리스 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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