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수로 3년 차, 발달장애인과 지체장애인을 대상으로 가벼운 봉사를 해오고 있다.
장애인에 대한 이해도가 레벨 0이었던 내가 이제는 레벨 2 정도에 왔다.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으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서도 점차 알게 되면서부터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봉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다시 생각해도 신비로운 어떤 힘에 이끌려서다.
이사를 하고 새로운 동네에 적응하기가 막막하던 차
우연히, 지인의 후배가 내가 새로 이사 간 동네에 살고 있었고
우연히, 그 후배는 내가 다니던 회사 바로 인근에 살았고
우연히, 지인은 내게 그 후배를 소개해줬으며
우연히, 그 후배는 내가 혼자 찾아갔던 집 근처 성당의 청년회장이었다.
내게 자신이 경험한 최고의 활동이라며 봉사단체를 추천했던 그분의 이야기가 마음에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반년이 훌쩍 넘도록 다른 일들에 몰두했던 나는 그해 겨울, 우연한 힘에 의해 결국 단체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유독 감사한 일이 많았던 성탄, 행복한 크리스마스이브에 또다시 우연이 찾아왔다.
미사를 드리다 우연히, 봄에 들었던 봉사단체의 이름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바로 지금 시작해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면서 이상하게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미사가 끝나고 나눠준 축하 떡을 먹고 있는데, 저 멀리 그분이 눈에 들어왔다.
다가가 "저, 그때 옛날에 얘기하셨던 그 봉사단체 있잖아요? 해보고 싶어서요." 이야기를 하자
그분이 "그래? 안 그래도 나도 다시 시작하려고 했어. 지금 바로 인사하러 가자." 하는 것이었다.
우연하게도, 그분은 이후에 봉사단체 사람들과 식사를 하러 가려던 참이었고
나는 그 자리에 따라가서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그렇게 새해 1월 1일부터,
낯설고 새로운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그 1월 1일의 경험이 얼마나 크고 다양한 충격으로 가득했는지..
지체장애에 대한 이해도가 현저히 낮은 나로서는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작년 12월 즈음부터였다.
사업이라는 크나큰 도전에 뛰어든 나는 마음이 급했다.
종일 가만히 앉아있어도 마음은 이리저리 바삐 뛰어다니며 조급하게 굴었다.
'매주 봉사를 간다고? 일하기에도 바빠 죽겠는데...' 스멀스멀 딴생각이 들었다.
뭘 했다고 단체에서 감투까지 하나 달고는 알량한 책임감에 허덕였다.
답답한 마음에 주변에 자문을 구해보기도 했다.
"꾸준히 해봐. 대단하지 않아도 돼. 할 수 있는 만큼만 해."
애초에 질문을 할 사람을 잘못 선정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올해도 나는 봉사를 한다.
사실 코로나 상황이 심각해져서 할 수 있는 것도 많지 않다.
그럼에도 시간을 내어 놓고, 마음을 내어 놓고, 소정의 물질도 내어 놓아야 하는 봉사활동에
이제는 큰 부담을 가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적게 내어주고 많이 받는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봉사를 통해
내가 잘 살도록, 내가 잘 나가도록, 내가 잘 벌도록...
오직 나를 향한 시선에서
남이 잘 살도록, 남이 잘 나가도록, 남이 잘 벌도록...
남을 향한 눈을 뜨게 되었다.
좁고 미어터지는 나의 작은 세상에 움츠리고 앉아 나만을 위해 살던 때의 나는 자꾸만 세상에 주눅 들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조금 다르다.
보잘것없는 스스로지만
아주, 아주 작은 것이라도 다른 이를 위해 내어 줄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나에서 남으로,
'ㅁ' 하나 붙임으로써 세상이 달리 보인다.
약한 나를 파워풀하게 만드는 놀라운 기쁨을 언제까지고 잊지 않고 싶다.
더 많이 나누고 더 많이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더 큰 꿈을 꾼다.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 <평화를 구하는 기도> 중, 성 프란치스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