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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수 Jul 23. 2023

나는 누구에게 상처 주지 않았나?

추모합니다. 이 세상을 떠난 모든 이들을

물난리에

사고에

상처받은 사람들과

많은 이들의 가슴아픔으로

습도 높은 요즘 우울하다.


마당을 내다보면 길냥이에서 우리 집 마당냥이로 사는 그들의 삶은 팍팍하다.

내가 아무리 잘해주려 해도 한계가 있다.

저녁이면 모기향을 피어놔도 이렇게 비가 주룩주룩 오는 날도 모기들이 달려든다.

흡혈벌레들은 그들의 피를 조금이라도 뜯어먹으려 안감힘을 써서 매달린다.

거기다 바이러스니 세균이니...

4년 이상되니 약한 아이들은 구내염으로 고생들을 한다.

그래도 먹고살겠다고 사료 그릇에 입을 대고 씹어 삼키려 하지만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오늘도 끼니를 때운다.

밥을 주면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다.

약을 섞어 캔을 줘보니 3일째부터는 입들을 안 댄다.

요즘 같은 날씨에는 벌레들이 비린내를 맡고 달려들어 하루 지나면 바로 치워야 한다.


아깝다.

약값도 약값이지만 2시간 넘겨 기다려 타온 약인데...


아픈 고양이들을 보며 내가 해주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순간이 참 힘든데

요즘 뉴스는 내 자식들이 살아갈 세상의 미래가 암울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아 마음이 더욱 침침해진다.


나만 그런가?

뒤지고 찾아 나와 공감하는 사람들을 찾는다.

그래 나만 화나고 속상한 건 아니야.

추스르자.... 음 그래 잘 못 된 거야. 이런 생각들이 모이고 있으니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자.


그런데 또 터지는 사건들.


이번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며 경종을 울린 한 젊은 여교사의 안타까운 사연은 남의 일 같지 않다.

내 아이들과 나이가 비슷한 이유도 있고

내가 만난 여러 부모들과 아이들의 모습이 겹쳐서 영화처럼 시나리오가 써지기 때문이다.


그 시나리오가 얼마나 악독하기에 젊은 선생은 그러한 결심을 하게 된 것일까?


예전에 학원에서 한 학생에게 내가 한 말이 있다.


"어른도 상처받아. 나도 조심할 테니 너도 말할 때 조심해 줘."

"네가 상처받았다면 미안하다.

그런데 숙제도 안 하고 친구들과 떠들고 내가 알려주는 거 무조건 모르겠다며 듣지 않고

그런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고 내가 넘어가면 너한테 이익이 될까?"


글쎄 모르겠다.

솔직히...

어른들이 가르치는 역할은 어디까지일까?


예전 우리 아이들이 학교 다닐 때 신입으로 부임한 선생님이 무척이나 힘들어하던 모습을 1년을 본 적이 있다. 초임선생님께는 맡기 힘든 학년을 맡긴다는 썰이 있었다.

그 학년이 1학년과 5, 6학년이라는 거다.

대략 연세 있으신 선생님이 저학년을 맡는데 1학년은 막 학교생활에 적응하느라 탈이 많은 가 보다.

게다가 늦게 입학하는 애부터 일찍 입학하는 애까지 발육상태가 들쑥 날쑥에다가 사회화가 덜 되어 좀처럼 아이들의 생활지도가 쉽지 않아 보이긴 했다.

그런데 5, 6학년은 왜 힘들까?

한참 또래 문화가 형성되는 시기로 왕따문제가 요 때 주로 발생하는 거 같았다.


큰아이 때도 작은아이 때도 학상 그 학년이 되면 그런 문제들이 반에서 불거졌다.

그럴 때마다 담임 선생님들은 무척이나 곤혹스러워했다.

부모님들은 담임에게 항의하고 그 항의한 부모들의 자식을 매일 보며 가르치는 일을 해야 하는 초등학교 선생님들의 어려움을 가까이에서 볼일이 있었는데 너무나 여린 선생님이 딱해서 위로가 될만한 책 한 권을 들고 담임선생님을 찾아갔던 기억이 있다.

별로 도움이 못 되었던 것 같지만...


아이에게 들어 문제 일으킨 아이의 성향도 잘 알고 그 부모도 몇 마디 나눈 사이라 잘 알고 있어서 그렇게 까지 꼬일일이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해결할 수 있는 길은 막막했다.


이러한 문제는 애초부터 씨앗을 가지고 시작한다.

부모와 그 아이들

부모는 그 부모로부터 배우고 사회는 가정의 문제를 발생시키는 토양이 된다.

그리고 문제를 앉고 키우는 부모가 있고 그걸 키워서 자식에게 물려주고 자식은 환경의 토양에 뿌리를 두고 문제를 더욱 싹 티우는 구조라고 해야 하나?


나도 그 구조의 일원인지도 모른다.

어설픈 위로나 반성으로 상처 주지 말아야 한다.

무엇이 상처인지 모르면 이 말을 하면서 적어도 내가 화가 낫나 검증하면서 말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이조차 듣지 않는 사람이 휘두르는 칼은 어찌해야 할까?


인류는 말에 대한 경고를 계속하고 있다.

자신의 입안에 도끼가 있다.

나도 모르게 휘두르는 도끼를 나는 잠재울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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