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근한 밤, 아이들을 재우며 책을 읽어주는 동안 하나둘 쓰러져 간다. 언제부터인가 잠에 빠져들기 직전이면 둘째가 하는 말이 있다.
"엄마, 엉덩이 긁어줘..."
땀이 차는 작은 등과 엉덩이가 가렵나 보다. 의식의 끈이 끊어지는 순간에도 여전히 엄마와 연결된 느낌을 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 날부터인가 경건한 수면 의식에 포함되어, 찹쌀떡처럼 작고 귀여운 말랑말랑한 엉덩이와 작은 등판을 구석구석 부지런히 긁고 있는 나.
이 말을 듣는 순간, 곧 잠에 빠지겠구나 반가운 마음과 동시에 귀차니즘이 올라온다. 육아의 나날에는 이렇게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일들이, 해도 해도 티 나지 않거나 그야말로 비생산적인 일들이 태반이다(육아 이야기지만 '태반'이라는 단어는 왠지 쓰고 싶지 않은데 다른 표현이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1mm만 자라도 어쩌다 보면 피부를 긁어 상처를 내버리고야 마는 연하고 부드러운 손톱을 늘 깔끔하고 맨들맨들하게 유지하는 일이라던가, 어차피 흘릴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 충분히 소근육 발달의 시간을 만끽하도록 허용해주는 시간이라던가, 갈대보다 더 빨리 더 많이 흔들리는 아이의 마음을 따라가는 일이라던가...
지금보다 더 아기 때의 사진들을 뒤적여본다. 이 때는 말을 했던가? 가물가물한 시절임에도 신생아 시절 이후로 언제나 너와 연결되어 있는 기분이다. 모든 순간 너와 소통하고 네 마음을 다 알 것 같은 기분은 참 좋다. 분명 지금처럼 온갖 이야기를 유창하게 하지 못했을 때임에도 동그랗고 빛나는 눈 속에 이미 너의 영혼이 가득 차 있음이 느껴진다.
때때로 잉여의 행위에 저항이 느껴질 때면,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이 순간을 즐기기로 마음먹는다. 순식간에 관점이 변화한다. 돌아보면 모든 순간이 귀하다. 머무르는 바로 이 순간에, 돌아볼 때만큼 또는 그 이상 온전히 행복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현자가 되리라. 이 보드라운 (특히 엉덩이) 살결을 만지기 어려운 그날이 올 것이기에, 나는 오늘도 감사히 엉덩이를 긁는다. 실은 아이의 마음속에 엄마의 사랑을 피워 올리는 고귀한 창조의 시간임에 틀림없다. 둘째를 낳고 조리원에서의 마지막 날, 영화 '미라클 벨리에'를 보고 전의를 다지며 해둔 메모가 있다. 고되다 느끼는 때마다 오직 내가 기억해야 할 것은 아이들은 곧 비상한다는 것, 우리 품을 떠나서. 지금 내 품에 있는 이 순간에 감사하고 또 감사하며 마음껏 사랑할게.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에 온전히 머무는 것은 명상과도 다름없다. 모든 잡념으로부터 벗어나 오로지 아이의 눈빛만을 바라보고 아이의 숨소리, 웃음소리를 들으며 아이가 함께 하기를 원하는 그 무언가에 집중하는 그 순간 비로소 완전히 '나'는 사라진다. '나'를 인식하는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났을 때, 나라는 존재를 잊어버렸을 때 느껴지는 순간의 자유로움은 꽤 괜찮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