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상

형이상학적 육아일기

by K Y Shin




"여군 같으세요."


군부대 근처에만 가본 내가 종종 듣는 말이다. 그저 공적인 자리에서 깍듯하게 '-ㅂ니다' 체를 종종 쓰기에 듣는 말이라 생각했는데, 한분이 목소리가 우렁차고 씩씩하고 빠르게 일처리 하는 모습이 여군 같다고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신다. 그 순간 '뮬란'이 떠올랐다.



파(花)씨 가문의 외동딸로 활동적이고 불 같은 성격이다. 여자는 조용하고 공손해야 한다는 당시의 관념에 어울리지 않는 괄괄한 품행으로 주위에서 많은 질타를 받지만, 그래도 효심이 깊어서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본심을 억누르고 요조숙녀의 모습을 갖추려 노력한다. 다리가 불편한 아버지를 대신해서 당대의 남성상에 맞도록 변장하고 군대에 들어간다.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위기에 처한 나라와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다시 한번 전쟁터에 뛰어들 정도로 용감하고 영웅적인 인물.

'뮬란', [나무위키]






여느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디즈니 만화영화를 참 좋아했다. 에리얼, 세바스찬으로 대표되는 디즈니 영화 '인어공주'(1989)의 장면을 모아 만든 책을 생일 선물로 받은 적이 있었는데 굉장히 아꼈던 기억이 난다. 그간 보던 책들과 달리 유광 종이에 영화 장면을 그대로 옮긴 쨍한 색감이 감동적이었다.


수많은 디즈니 영화를 사랑했지만, 막상 돌아보면 지금까지 내 인생을 좌우한 영화는 결국 '뮬란'(1998)이었다. 중국 남북조시대 작자 미상의 화목란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라는데, 어쩐지 내가 멋지다고 생각하는 요소를 모두 갖춘 캐릭터였나 보다. '화목란(花木蘭)'이란 이름이 영화에서는 'Fa Mulan'으로 표기가 되었는데, 어째서인지 PC가 본격적으로 보급되던 그 시절부터 줄곧 내 온라인 세계의 별명은 바로 그 뮬란이었다.


'뮬란'이라는 글자를 입력할 때마다 이 인물의 특성이 서서히 내 영혼에 스며들어 정체성을 일구어 왔으려나. 그저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를 '뮬란'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인지한 덕분에 어쩐지 여군의 성품을 갖추고 말았다. 그래서인지 성공학에서는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단순화시켜 온라인 아이디나 비밀번호 등에 사용하라고 한다.



그렇다면 아이들의 자아상은 언제 형성이 되는 것일까? 위인전이나 소설, 영화의 주인공들을 보며 좋아하는 부분을 취향껏 흡수하기도 하겠지만, 아마도 자아를 인식하는 순간부터 끊임없이 쏟아지는 주변(대부분 부모)의 평판에 따라 그 말랑말랑한 클레이가 점차 모양을 굳혀갈 것이다.


내 한마디 한마디가 우리 아이 스스로를 규정짓는 마법의 언어가 되어버리기에 언제나 긍정의 언어를 사용하려 애쓴다. 실제로 모든 아이들은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기에, 내가 쌓아온 관념의 언어로 비루한 울타리를 만들지 않도록 차라리 말을 아낀다. 시공간이 말랑말랑한 무한계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내 굳은 관념을 깨버릴 수 있는 기회에 감사하며 그저 네가 해낸 것을 보고, 읽고, 감탄할 뿐이다. 무한한 네가 너의 선택에 자신감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도록 아주 작은 것부터 매번 너의 선택을 기다리고 존중하며 따르는 시간들이 즐겁다. 장난감을 고르던 네가 이제는 읽고 싶은 책을 고르고, 아침마다 날씨와 장소에 어울리는 옷을 골라 입고 나오는 네 모습에 매일 사랑에 빠진다.








덧, 오늘의 교훈.

둘째 아이가 언제나처럼 황급히 뛰어가다 넘어졌다. 마음속에는 케케묵은 관념의 언어들이 응어리진다.

'그러니까 맨날 넘어지지, 앞을 잘 보고 가야지, 좀 걸어 다니라니까... 위험해!!!'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아 입은 다물었다.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아이에게 파이팅을 시도하며 외쳤다.

"일어나~!"


그리고서 나는 아이에게 칭찬스티커를 받았다.

"엄마가 일어나라고 맞는 말을 해서 주는 거야~"

"그래? 그게 맞는 말이었구나. 그럼 무슨 말을 하면 안 되는 걸까?"(매우 궁금)

"위험해!(내가 자라면서 수없이 들어왔고 그래서 여전히 집중하지 않으면 쉽게 쓰는 말이다.)라고 하면 안 되는 거야. 그러면 칭찬 스티커 다시 떼어 갈 거야~ 그러니까 내 말 잘 지켜야 돼~"


네, 스승님. 앞으로도 정신 잃지 않고 잘 지킬게요.

위험한 상황에서 아이를 두렵게 만드는 단어를 말로만 크게 소리칠 것이 아니라, 어른이 달려가서 그 상황으로부터 안전하게 구하기만 하면 된다고, 그리고 나긋하게 행동을 지도하라고 했었죠.

배운 것을 당신께서 몸소 확인해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