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은 나의 채널을 통해 창조되는 것이기에 내가 만든 이 현실에서 나를 비추어볼 수 있다. 우리 각자의 자기만의 세계, 자신만의 독특한 현실과 생활 체험, 그것을 우리가 만들고 있다. 우리의 경험은 계속해서 우리 자신을 되비추어 주는 것, 이 현실은 우리의 겉과 속을 자세하고 분명하게 비추어주는 거대한 거울이다. 여기에는 전제가 있는데, 내 생에 발생하는 모든 것이 나의 반영이요, 나의 창조물임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 삶에 많은 부분을 우리가 스스로 선택했다는 관점과 또 나머지 부분을 우리가 계속해서 만들어가고 있다고(만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나와 연관 없는 일이나 사건은 발생하지 않는다. 내가 만일 무엇을 보거나 느낀다면, 어떤 영향을 미친다면, 그것은 내가 나에게 무엇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것을 끌어당기거나 만든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무엇은 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은 내 안의 온갖 성격과 느낌을 비추어 보여준다. 하지만 그 반영들 때문에 결코 나를 탓하거나 주눅 들게 할 필요는 없다. 부정적인 것, 좋지 못한 것은 결국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나를 깨달음으로 이끌어가는 선물이다.
나는 배우기 위해 여기 있다. 내가 만일 완벽하다면 여기 있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 자신과 나의 배움의 과정에 대해 너그러운 태도를 유지한다. 그러한 자세로 있는 한, 배움의 과정은 재미있게 진행될 것이다. 내 인생을 매력이 넘치고 모험으로 가득 찬 한 편의 영화로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그 스크린에 비춰지는 나의 분신들이다. 내가 그들을 보고 내 안에 있는 그들의 그 여러 가지 느낌과 음성을 인식하게 된다면 내 안의 어떤 성질들을 지킬 것이고 키울 것이며, 또 어떤 성질들을 놓아버리고 바꿀 것인지 선택할 수 있다.
나 자신을 온전히 신뢰하고,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이 될 때, 내 인생의 모든 일이 쉽게, 가끔은 기적같이 그렇게 제 자리를 찾아가서 내 모습을 되 비추어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샥티 거웨인, [나는 날마다 좋아지고 있다]
지금까지 아이들을 키우면서 내게 가장 힘든 부분을 꼽으라면 단연코 잠이다. 조리원에서 첫째를 안고 집으로 돌아와 조그마한 아기가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나를 찾을 때, 그 곁에서 휴대폰으로 음악을 듣는 것 외에는 꼼짝도 하지 못했던 그때가 여전히 생생하게 떠오른다. 새벽에 수유복 가슴팍을 열어 말 없는 너와 나의 잠을 함께 청할 때, 그렇게 평생 가까스로 붙들어오던 잠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하고서 나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을 잃고 말았다. 온 우주 속에 오로지 내 영혼만 땅에 발을 딛지 못하고 부유하는 느낌이었다. 외로웠다.
발달에 따르면 4개월이면 온잠을 잘 수 있지만, 우리 아이들은 두 돌, 세 돌이 지나도 여전히 밤에 깼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이 '그런 수면습관을 가진 아이'인 것이 아니라 '내'가 그랬던 것이었다. 나 스스로 나에게 어마어마한 당직을 세운 결과였다. 나는 본디 잠귀가 무척이나 밝아 쉽게 깼다. 아이가 부모를 찾으면 바로바로 반응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밤에는 좀 다른 이야기다. 아이가 뒤척일 때마다 나는 반응했고, 내 반응에 아이도 반응했다. [프랑스 아이처럼]에서 스스로 자는 법을 배우게 해주는 잠깐 멈추기의 비법을 첫째 때도 둘째 때도 마음 깊이 품었지만 결국 제대로 행하지 못하였다. '누가 업어가도 모르게 잘 자는 것'이 내게는 없었기 때문에. 그런데 새벽에 둘째를 보살피느라 뒷전일 수밖에 없었던 첫째가 언제부터인가 잘 자기 시작했다.
내 얄팍한 지식과 퀴퀴한 관념의 무덤 속에서 얼마나 우리에게 이런 굴레를 많이 씌웠을까? '나는 원래 이런 사람', '너는 참 이런 아이'와 같은 생각을 끊임없이 하면서 말이다. 사실은 하나인 너와 나를 별개의 존재로 인식하면서 이렇게 나는 배우고 있다. 나보다 더 사랑하는 너와 이 모든 것들은 나를 깨달음으로 이끌어가는 선물이다. 너를 위하는 마음에서 출발하여 내 안의 어떤 성질들을 지키고 키울지, 어떤 것들을 놓아버릴지 매 순간 선택한다. 부정적인 것, 좋지 못한 것은 결국 없음을 알아차리고, 너의 행동에 한계를 짓거나 엄마로서의 나를 채찍질하지 않고 흘려보내려 한다. 너의 어떤 순간이 걱정된다면 너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 내 안의 두려움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나를 더 들여다본다. 그것이 바로 '나'를 믿지 못하는 바로 그 지점일 테다.
"모든 것은 내 안에 있다."
내 안에 있는 것만을 다른 이에게서 볼 수 있고, 내가 생각하는 것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할지 모든 순간의 '정답'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나는 알지 못한다 생각했고 그래서 끝없이 육아서를 파던 시절, 그 갖가지 공식들을 외웠다. 처음에 완전히 이해가 되지 않아도 외운 공식을 적용해서 계속 문제를 풀다 보면 한순간 깨달음이 오듯이, 딱 그런 시간들이었다. 옅은 깨달음이 켜켜이 쌓여 엄마로서의 나를, 인간으로서의 나를, 그 뚜렷한 형체를 찾아가고 있다. 점차 사랑으로 아이들의 뒤를 지키며 부지런히 따라가는 것이 전부라는 것을 느낀다. 아주 편안한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넘쳐 내어 줄 수 있는 것들이 부모의 사랑일진대, 이 사랑의 그릇을 키우는 것이 인간의 숙제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 어린 관심과 진정한 공감, 너의 감정을 우리가 함께 읽고 다스리며 나 자신을 믿으면, 이런 나를 보며 아이는 스스로 사랑하고 성장하며 자주 많이 행복할 것이라 믿는다.
이미 완벽하게 눈부신 존재 그 자체인 너를 바라보며 해석하고 판단하는 내가 있음을 오늘도 알아차리며, 엄마는 이렇게 조금씩 나아갈게. 엄마가 되던 해의 나를 꼬옥 안아주며 귓가에 속삭이고 싶다. 내가 엄마가 될 준비가 되었기에, 즉 배울 준비가 되었기에 아이들이 축복으로 와준 것이라고. 너무도 소중한 네게는 엄마가 이 세상 전부일 거라 너무도 조심스럽고 또 야심 찼던 덕에 네 곁에서 엉덩이도 떼지 못했던 내 어깨를 흔들며 어떻게든 당장 나가 콧바람을 쐬고 영혼을 찾아 오라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