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러버무비 Jun 29. 2018

돌이킬 수 없는

Irreversible, 2002, 가스파 노에 감독

파티 중에, 알렉스는 남자 친구 마르셀로와의 사소한 말다툼 이후에 그를 놔두고 먼저 자리를 뜬다. 집에 돌아가기 위해 지하도로 내려간 그녀는 거기서 우연히 마주친 어떤 남자로부터 잔인하게 강간과 폭행을 당한다. 지인 피에르와 아무것도 모른 채 놀고 있던 마르셀로는 피떡이 된 채 실려가는 알렉스를 보고 충격에 휩싸이고 절망에 빠진다. 곧, 거리의 갱들에게 도움을 받게 된 그는 자신의 애인을 무자비하게 강간했던 남자를 좇아 참혹하게 복수하기로 다짐하고 범인을 잡기 위해 동분서주하기 시작한다.


※ 이 리뷰에는 영화 '돌이킬 수 없는'의 줄거리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근 소피아 부텔라가 주연을 맡고 칸 영화제에서 화제작으로 떠올랐던 '클라이맥스'를 연출했던 가스파 노에 감독은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문제작들로 이전부터 유명했다. '엔터 더 보이드'에서는 사이키델릭한 영상미와 함께 극단적인 수위의 섹스 장면들이 나와 논란이 됐었고, '러브 3D'는 실제 정사 장면들로 말이 많았던 영화였다. 하지만, 가스파 노에의 대표작으로 하나만 꼽으라고 하면, 그를 프랑스의 극단주의 영화의 대표적인 감독으로 등극하는 데에 확고한 영향을 끼치기에 충분했던 영화 '돌이킬 수 없는'을 주저 없이 꼽을 것이다. 실제 부부 사이였던 뱅상 카셀과 모니카 벨루치가 주연을 맡은 사실만으로도 투자받을 가치는 충분했고, 마치 '메멘토'를 연상시키는 역행 구조의 서사는 흥미를 불러일으키지만, 관객들이 마주칠 이야기와 노에 감독의 연출은 혹독하다 못해 진을 쫙 빼버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관객들 머릿속에 확실히 깊게 박을 만한 요소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현실을 미화 없이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는 점이다. 마르셀로와 알렉스가 나체로 애정 섞인 대화를 하는 장면, 지하철에서 쉬지 않고 세 주인공들끼리 이야기하는 장면, 마르셀로가 성교가 난무하는 게이 바까지 가서 강간범을 찾으러 다니는 장면 그리고 가장 악명 높은, 알렉스가 지하도에서 무자비하게 강간을 당하고 얼굴에 폭행까지 당하는 장면까지. 7~8분 동안 다른 숏으로 넘어가는 편집 없이 한 카메라로 연속으로 찍는 롱테이크 기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작중 인물들에게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지 그들 가까이에서 가만히 지켜보게 만드는 듯한 느낌을 받도록 한다. 영화 속 인물들이 실제로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사람들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관객들이 그저 인물들에 감정을 이입하는 것을 넘어서, 직접 카메라를 들고 찍는 핸드헬드 기법과 롱테이크 기법 등의 연출을 통해 아예 상황 자체에 직접 들어간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렇게 주인공들 옆에서 같이 따라다니면서 사건을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관찰자'가 되어 몰입도가 증가한다. 즉, 작중 인물들과 관객들 사이의 심리적인 거리가 가까워진 셈이다. 하지만, 주인공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점을 인지시킴으로써 눈높이를 동등하게 조절하게 만들면서 작품에 현실성과 사실성을 제대로 불어넣었기 때문에 오히려 폭력적인 장면들은 더욱 비참하고 불편하게 보인다.


우리가 뉴스에서 듣게 되는 묘사처럼 영화에서 한 여자가 참혹하게 강간을 당하는데, 다른 영화들보다도 심리적으로 더 가까운 위치에서 범죄를 목격하게 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건 영화이기 때문이다. 우린 관객이지, 작중 인물들이 아니다. 현실과 영화는 분리되어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 순간 그저 사건을 지켜볼 수 없다는 무력감과 내 주위 사람이 당하는 듯한 심리적 밀접함이 합쳐지면서 폭력이 난무하는 장면을 보기가 훨씬 더 힘들어지는 것이다.  


알렉스 역의 모니카 벨루치 본인도 자신이 찍은 강간 장면을 끝까지 다 보지 못 한다고 한다.


두 번째는 서사를 역순으로 진행한다는 점이다. 처음에 나오는 장면이 이 영화의 결말이 되는 것이고 마지막에 나오는 장면이 시간적으로 가장 먼저 일어나는 사건을 다룬다. 정확하게 따져보면, 제작진들의 이름이 나오는 엔딩 크레디트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나오는데, 이것조차 위로 올라가는 방식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가는 방식을 취한다. 급기야 '시간이 모든 것을 파괴한다'라는 텍스트와 함께 영화가 끝이 난다. 당황스럽다.


굳이 왜 이런 방식을 취한 것일까? '메멘토'처럼 주인공이 자신의 모르는 기억을 되짚어봐야 한다는 플롯처럼 내러티브에 있어서 역행 구조가 꼭 필요한 스토리가 아닌데 말이다. 가장 큰 이유는 이 작품에서 쓰인 역행적 구조의 서사는 연출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효과로 작품이 가진 비극성과 참혹함을 더욱 극대화시킨다.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 어떤 남자가 앰뷸런스에 실려 가는 것을 목격한다. 그러더니 소화기로 사람 얼굴을 거의 부서질 때까지 내리찍는 장면으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한 사건 이전에 발생했던 사건을 나중에 밝혀주는 형식이기 때문에 주인공들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인지 중반부까지 궁금하게 만드는데, 노에 감독은 복수극의 결정적인 시발점이 되는 강간 범죄 장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 관객들이 가지고 있는 호기심을 가장 잔혹하게 깨부수는 연출을 선보인다.


아이러니하게도 본격적인 비극은 강간 장면 이후부터 시작되는데, 폭력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는 듯한 인상까지 주는 장면들 이후에는 주인공들의 일상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후반부에 가서는 내내 격하게 흔들렸던 카메라가 굉장히 정적으로 바뀌고, 대화 주제는 상당히 일상적이고 시시콜콜하며,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뒷배경과 내면을 가장 직접적으로 잘 파악할 수 있다. 심지어 마지막에는 '2001 :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스타차일드 포스터와 임신 테스트기에 대한 알렉스의 반응을 통해 생명의 탄생까지 암시하는 장면까지 나오면서 숭고한 이미지까지 심어 준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비극적인 결말을 갖게 될 것임을 알고 있다. 알렉스와 마르셀로 그리고 피에르까지 모두 이전까지의 삶으로 다시 되돌아가지 못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오직 그들만 모른다. 개인적으로 가장 충격적이었던 요소는 마르셀로와 피에르가 복수하려고 타깃으로 잡은 남자가 실제로 알렉스를 강간한 범인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쥐어팬 남자 옆에 서 있던 자가 실제 범인이었으며, 다시 돌려봤을 때 몸싸움이 벌어지고 있을 당시 유유히 뒤에서 그가 미소를 띠고 있는 장면을 포착했을 때는 정말 소름이 돋았다.



예측할 수 없는, 정해지지 않은 미래만큼 정해져 있는 미래 또한 충분히 공포스럽다.


영화와 현실은 다르다. 영화는 현실 세계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창작한 작품으로서 현실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기는 하지만, 엄연히 편집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그 창작물을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현실과 다르다. 둘은 닮은 듯 하지만 전혀 닮지 않은 셈이다. 모든 일은 운명처럼 정해져 있다는 결정론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따라서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를 수는 있지만, 최소한 영화는 각본가와 감독이 정해놓은 결말을 향해 달려간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영화 결말을 예측해보면서 불안감에 휩싸일 관객들의 숫자보다는,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의 미래가 두려워 불안감을 갖는 사람들의 숫자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크다. 대충 어떻게 끝날지 예측이 가능하다는 확실성 덕분에 나름 스트레스 없이 즐겁게 볼 수 있다.


하지만, 감독은 이렇게 질문해본다. 만약 미래가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 비극이라면? 그것을 알고 있는데도 대응하지 못 하는 것이 더 불행할까, 그것을 모르고 있기에 대응 자체를 생각하지 않게 되는 것이 더 불행할까? 이 주제는 '나비효과'나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시리즈에서 중점적으로 소재로써 다뤄진 바 있다. 하지만, 가스파 노에 감독은 다른 영화들처럼 똑같이 그 주제를 이야기로 쓴 게 아니라 영화 외적의 내러티브의 영역으로 확장시키면서 신선한 접근을 시도한다.


영화가 가진 세계관 내부에 있는 주인공들은 짜인 이야기대로 고통을 받고 암울한 최후를 맞는다. 그와 반대로 작품과 분리되어 있는, 영화가 가진 세계관 외부에 있는 현실 속 관객들은 그들의 위치에 걸맞게 감독의 연출로 고통을 받고 암울한 최후를 맞는다. 롱테이크 등의 촬영 기법들로 세 명의 주인공들한테 심리적으로 가까워진 상태에서, 알렉스가 강간당하는 장면에서 관객으로서 아무 대응도 못 한채 그저 지켜보고만 있어야 한다. 게다가 역행 구조를 통해 범죄자와 맞닥뜨리기 전까지 주인공들이 자신들의 운명도 모른 채 얼마나 행복하게 살고 있었는지 알게 되면서 안타까움과 고통을 자아낸다. 아예 처음 30분 동안에는 현기증을 유발하는 주파수를 사용한 음악을 삽입했을 정도로 나름 관객들의 정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려고 무수한 노력을 한 것이다.


만약 처음에 마르셀로와 알렉스 커플이 애정 행각을 벌이고 후반부에 가서 마르셀로의 복수극이 펼쳐졌더라면, 마르셀로라는 인물이 어떤 경로를 통해 결말을 맞이하냐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한 명의 인간에게 집중하게 됐을 것이다. 애인 말도 제대로 안 듣고, 애꿎은 사람 때려서 죽을 지경까지 만드는 행적에 치중되면서 답답함을 안겨줬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거꾸로 되감기한 듯한 진행 방식으로 이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고, 왜 이 사건과 연관이 되어있는지 사건 자체에 집중할 수 있었다. 실제로 중반부까지의 카메라의 흔들림은 혼돈과 분노에 휩싸인 마르셀로의 내면을 상징할 수도 있지만, 어떤 일이 왜 벌어졌는지 혼란스러워하는 관객들의 내면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정확히 알렉스가 강간당하는 7~8분부터 카메라는 순식간에 정적으로 변한다. 모든 일의 시발점이 되는 그 현장에서부터 말이다.



정리하면, '돌이킬 수 없는'는 현실과 영화와 밀접하게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하고 있지만, 둘은 엄연하게 분리되어 있는 영역이라는 것 또한 확실히 정하고 있다. 주인공들이 영화 내적의 스토리로 고통을 받는다면, 관객들은 영화 외적인 연출로 고통을 받는다. 더불어, '돌이킬 수 없는'이라는 제목은 다양한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캐릭터들은 다시는 평범한 삶을 못 찾을 것이라는 결말을 나타낸 것일 수도 있고, 우리가 인위적으로 편집을 통해 서사의 순서를 거꾸로 바꾼다고 해도 작품의 결말은 정해져 있기에 인물들은 비극을 피할 수 없다는 결정론을 나타낸 걸지도 모른다. 아예 작정하고 만들었기 때문에 이 영화를 관람한 이후의 관객들의 심정을 예측한 듯한 제목일지도 모른다.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주인공들이 이 사건을 통해 갖게 될 트라우마나 내면의 상처는 더욱 심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거나, 역순으로 진행해봐도 더욱 비극성은 심해질 뿐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초반부에는 카메라가 너무 흔들리다 보니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 건지 확실이 들지 않을 때가 많았고, 어지럽기도 해서 보기 너무 힘들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이 작품을 관람하는 것 자체가 도전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얼굴을 찡그리게 한다. '굳이 이렇게까지?'라는 물음과 함께 진이 빠지니까 한숨이 절로 나온다. 모니카 벨루치와 뱅상 카셀 그리고 알버트 뒤퐁델의 연기까지 세 배우 모두 대단한 연기를 선보였다. 훗날 '엔터 더 보이드'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는 문구 오프닝과 어지럽게 만드는 음악의 시초는 이 영화가 시초였다는 것이 반갑기도 했고 놀랐다. 비극적인 분위기에 걸맞은, 베토벤의 '교향곡 제7번 A장조 2악장'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남들에게 추천해주기에는 '세르비안 필름'만큼이나 위험한 작품임에는 분명하다. 7/10


가스파 노에의 영화 해체 성공기, 모두를 좌절시키다.

가스파 노에가 찍은 이미지 중에 가장 알록달록하게 색감이 예쁘게 들어가 있다. 해피 엔딩이 아니라는 것을 감안하면...


작가의 이전글 피아니스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