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살 막바지에 떠난 산티아고 순례길
어제는 운 좋게 꽤 괜찮은 알베르게에서 잠을 청했다. 모든 일에 약간의 운이 더해져 조금은 평탄하지 않은 순례길을 지금까지 걸을 수 있었던 것 같았고, (아직 많이 남았지만..) 나에게 그리고 동행자들에게 운이 향하는 사실이 실로 뿌듯한 행복감을 가져다주었다. 마치 초심자에게 운이 향하는 것처럼!
어제를 포함하여 그간 많이 걸어온 우리는, 오늘 약 22km 정도의 거리만 걸을 수 있는 달콤한 행복을 맛보았다. 확실히 거리가 짧아지니 마음의 부담감이 조금 덜어지는 느낌이었다. 평소와 같이 아침 일찍 일어나 다음 목적지인 사아군으로 부지런히 움직였다.
차가운 가을 아침,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을 보았다. 청명하고 시원한 아침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뱉으니 답답했던 숨이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오늘 우리가 갈 사아군이란 마을은 나름 규모가 큰 도시에, 신부님께서 직접 운영하시는 수도원 알베르게가 있는 곳이었다. 또한 사아군으로 가는 중간에 미드포인트(Mid-Point)또는 하프웨이(Halfway)라고 불리는 장소도 있는 재미있는 길도 있었다.
*Mid-Point/Halfway > 생장피에드포르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의 중간지점
벌써 이렇게 시간이 흘렀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하루하루 모든 순간에 집중을 하고 최선을 다하자!라는 생각을 되뇌었다.
시원한 공기 속 발이 아픈 자갈길을 걷다 보니, 뭉툭하고 크기가 조금 큰 자갈로 만들어진 왕 화살표와 '사랑해'라는 단어를 보게 되었다. 이런 소소한 재미 덕분에 더 걸을 힘이 났던 날이었었다. 하지만 배고픔 앞엔 장사 없는 법. 우린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한 바르로 들어갔고 따듯한 커피와 또르띠야를 각각 주문했다.
4.5유로의 간단한 아침식사와 테이블 위로 비치는 햇살, 그리고 그 주변을 맴돌던 애교 많은 강아지까지 조금의 피로함을 덜어주기엔 정말로 그만한 것이 없었다.
편안하게 잘 쉬고 배부르게 먹고 툴툴 털고 일어나 다시 걸었다. 감사하게도 오늘 걷는 길도 평탄했으며 비록 배낭을 멨지만 무겁던 다리가 한 층 가벼워져 컨디션은 꽤 괜찮았다. 그래서 기분이 좋았다. 날씨도 좋고 체력도 좋으니, 앞으로도 컨디션 조절을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사아군으로 걸어가는 도중에 언니들과 거리가 벌어져 혼자 걷는 시간이 있었다. 4명 혹은 5명이서 같이 걷다가 막상 혼자가 되니 처음엔 불안한 마음이었다. 앞서가는 B언니를 따라가야 할까? 아님, 뒤에서 오고 있는 K, N언니를 기다려야 할까? 무수한 고민과 둘 다 직접 해본 결과, 그냥 나의 속도로 홀로 걷는 것이 베스트라고 느꼈다.
어차피 우리의 목적지는 같으니까..!
이런 생각을 하고 나니, 이제 불안하고 조급한 마음보다는 혼자 걸으면서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셀카를 찍거나 크게 음악을 듣는 것 등.. 그래서 주변에 사람이 없고 혼자 걸을 때, 핸드폰으로 듣고 싶은 음악을 크게 들어 길을 걸었다. (**이때 10cm-그러데이션 노래를 처음 들었는데, 너무 좋아서 무한 반복해서 들었다)
이쯤이면 아마 모두 혼자 걸어가는 시간이 필요했을 거라는 추측도 살짝 해보았다. 그러면서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고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고 있을 언니들을 생각해 보기도 했다.
어느 정도 길을 걸었을 때, 우리는 한 곳에서 다시 모여서 같이 걸어갔다. 부족했던 물도 나눠 마시고, 휴식도 취하면서 조금 있으면 도착할 미드포인트를 같이 찾아 떠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미드포인트에 대한 정보는 찾기가 어려웠고 인터넷에서도 별로 없어서 혹시 못 찾고 그냥 지나치는 게 아닐까 했는데, 다행히 길을 따라가니 무사히 잘 도착했다.
거창하게 뭔가 있을 줄 알았던 그곳은 예상과는 다르게 휑한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여기까지 온 나 자신이 그리고 우리가 너무나 자랑스러웠던 순간임에는 틀림없었다. 사진으로 순간을 남기고 다시 숙소까지 이동을 했다.
조금 더 걸어서 우리가 오늘 신세를 질 알베르게에 도착을 하자, 한 신부님께서 물과 사탕을 주며 친절하게 맞아주셨다. 수도원 알베르게라 그런지 고즈넉하면서 경건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으며 오늘도 별 탈 없이 잘 도착했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배고픔이 몰려왔던 17일째 날이었다.
*어떤 행위를 했을 때, 그것이 좋았다면 추억이고 안 좋았다면 경험이라고 한다. 나는 나의 이번 순례길이 추억이 되길 바란다.
**10cm-그라데이션 / 원필-행운을 빌어줘 / dori 2 o'clock 추천하는 곡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