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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륭짱 Feb 12. 2023

순례 16일 차 : 노을이 더 이상 슬프지 않은 이유

26.9살 막바지에 떠난 산티아고 순례길


22/11/04 금요일 Walking D+15 & Stayed 1(Logroño)

Fromista(프로미스타) -> Calzadilla de la Cueza(칼사디야 데 라 꾸에사) 약 37km


거의 뜬눈으로 맞이한 오늘은, 어제와 비슷한 킬로미터의 거리를 걸어가야 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다음 목적지까지 가야 하는 것이 바로 순례길이다.


잠은 많이 못 잤지만, 이른 날씨의 쌀쌀한 공기를 들이마시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오늘도 만만치 않은 여정이 기다리고 있기에 언니들과 부지런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슬슬 밝아오는 하늘이 예뻐서 걸어가다 뒤를 돌아보기 일쑤였지만..



다음 마을로 향하는 길은 쭉 뻗은 자갈길이었고, 이미 우리보다 앞서서 길을 걷고 있는 몇몇의 순례자분들도 보였다. 그렇게 다들 자신만의 속도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때까지 쭉 걸어온 결과, 내가 하나 알아낸 것이 있었는데 바로 제각각 다른 언니들의 걸음이었다. 

우선, 사촌언니는 걷는 보폭이 커서 '성큼성큼' 걷는다. 그리고 B언니는 걷는 보폭이 작아서 '종종종종' 걷는다. 마지막, K언니는 걷는 보폭은 평범하지만 여유 있는 걸음이라 '사뿐사뿐' 걷는다. 이렇게 모두 다 다른 걸음을 가지고 있지만 같은 순례길에서 함께 걸어간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


 길을 걷다 보면 시시한 얘기부터 진지한 얘기까지 정말 다양한 주제와 소재를 가지고 수다를 떠는데, 오늘은 언니들에게 이걸 어떻게 얘기를 해야 하지? 하는 주제가 나왔다. 바로 [사촌언니의 생일]이었다. 

곧 있으면 N언니의 생일이었고 마침 계산을 해보니, 생일을 맞이하는 때가 대도시 레온(Leon)에 있을 때라, 우리는 그곳에서 깜짝 파티를 하기로 결정하고, 대화를 계속 이어나갔다.


걷고 얘기하고 사진 찍고 생각하며 어느 정도 다음 마을에 다다랐을 때, 우리는 아침을 먹을 바르를 찾아다녔다. 마을에 꼭 바르가 있다는 보장이 없지만, 그래도 기대를 하게 되는 게 사람 심리인 걸까? 하며 곳곳을 다녔지만.. 역시나 무용지물이었다. 


참, 밥 한번 챙겨 먹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쯤, 한 작은 레스토랑을 발견했다. 아직 정식으로 문을 연 것 같지 않았지만, 아침을 먹을 수 있냐는 우리의 말에 그분들은 흔쾌히 문을 열어주었다.


배고픈 우리에게 아침을 주셨던 고마운 레스토랑


우리가 첫 손님인 그곳은 조용하며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우리는 구석진 4인용 테이블에 앉아 음식을 기다렸는데, 조금 있자 넓은 플레이트에 갓 만든 토스트와 햄 그리고 치즈가 푸짐하게 담겨 나왔다. 또한 이어서 따듯하게 데운 우유와 커피가 등장했고, 빈 접시와 잔들만 있던 식탁이 어느새 따듯하고 정성 어린 아침식사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오렌지 주스를 비롯하여 시리얼과 버터, 잼까지 너무나 다양하게 준비를 해주신 덕분에 감사하고 배부르게 아침을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갈 때, 배고프지 말라고 작은 사과들도 비닐에 챙겨주셨다. 한국의 '정'을 이곳 스페인에서도 느꼈던 순간이었다. 


나는 든든한 마음으로 다시 길을 나섰다. 날씨의 도움을 받아 푸르른 하늘과 같이 걷고 있자니 어제의 일은 그새 먼 과거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거리마다 넘쳐나는 자연들과 중간중간에 나오는 낡았지만 여전히 멋진 건물들을 하나 둘 지나쳐가니 어느새 산티아고까지는 405Km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레스토랑에서 받은 사과와 405Km 비석


어제저녁을 함께하고, 숙소에 같이 묵은 H오빠와는 오늘도 같은 숙소에서 묵기로 했었다. 중간에 길에서 만나 같이 걸었는데 확실히 초반의 어색함과 불편함이 많이 없어진 나를 보게 되었다. 숙소로 향하는 해가 지는 길을 N언니와 나, H오빠와 걸어가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눴다. 그때, 그간 내가 어떤 선입견이 있고 어떤 불편한 감정을 가져왔는지 비로소 깨달았고 다시 나를 돌아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멀리서 해가지는 풍경이 더 이상 슬프지가 않았다. 오히려 걸음이 가벼웠다.

이건, 숙소가 가까워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제야 나의 부끄럽고 솔직한 마음을 스스로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숙소 창문에 기대어 바라본 하늘


우리는 미리 도착한 배낭을 가지고 더러운 신발을 벗으며 침대가 있는 곳으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많지 않은 수의 순례자분들이 계셨는데, 그중에서 한 순례자분이 감사하게도 K언니의 배낭을 위로 올리는데 기꺼이 도와주셨다. (기억에 많이 남는 순간 중 하나였던...)

 

그렇게 약 37km의 긴 여정이 오늘도 무사히 끝났음에 감사를 드리며, 맛있는 저녁과 술로 고단하고 행복한 하루를 마무리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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