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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륭짱 Jan 29. 2023

순례 15일 차 : 천국과 악마를 보았다

26.9살 막바지에 떠난 산티아고 순례길


22/11/03 목요일 Walking D+14 & Stayed 1(Logroño)

Hontanas(온타나스) -> Fromista(프로미스타) 약 37km


어제의 운을 다 써버린 탓일까, 오늘 날씨가 심상치 않았다.

비교적 이른 아침에 일어나 창 밖을 보니, 해는 먹구름에 가려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오늘은 지금껏 걸어왔던 거리보다 훨씬 긴 거리인(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 같았던..) 프로미스타까지 가는 날이었기 때문에 배낭을 동키로 보냈고 일찍이 서둘러 숙소를 나왔다. 다행히 동키를 보낸 터라 어깨는 가벼웠지만 마음은 좀 무거웠다. 요상한 날씨 속, 더욱 마음을 단디 먹고 프로미스타를 향해 다 같이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아침은 온타마스 마을로 더 들어가 문이 열려있는 한 알베르게에서 먹을 수가 있었다. 호스트는 우리를 공용 공간으로 보이는 테이블로 안내를 해주었는데, 그곳에서 H오빠를 딱 마주쳤다. 참 신기한 인연이라 생각하며, 아침으로 든든하게 참치 샌드위치를 먹은 우리 넷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Tuna Sandwich and coffee


아직 날씨는 우중충 그 자체였다. 챙겨 온 우비를 입었다가 벗었다가 해야 했는데 그런 수고스러움에도 불구하고 걷는 길은 꽤나 평탄해서 너무 신이 났다. (비록 그 평탄한 길이 초반에는 조금 지루했지만, 후에 언덕이 하나 나오면서 바로 후회를 했었던..) 평지를 신나게 걸어가자 저 멀리 언덕이 보였다. 살짝 두려웠지만, 내 페이스대로 가니 끝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그렇게 언덕을 넘고 다음 마을에서 간단하게 빵과 커피로 점심을 먹었다.

언덕을 오른 후, 나와 K언니


유난히 먼 길이어서 그런지 이 길을 걷고 있자니 오만가지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한국에 있을 때부터 줄곧 나를 따라다니던 고민들이 하나둘씩 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가장 큰 고민거리인 미래의 직업, 진로, 좋아하는 것, 취미 등.. 아직 구체적으로 결정된 것은 없지만 이제 차차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하는 문제이지 않나 싶었다.


그런 생각들로 가득 차 아직은 푸르뎅뎅한 하늘 아래를 걷고 있을 때, 오른쪽에 서있는 정말 마르고 긴 나무들이 속속들이 보였다. 가지런하게 정렬이 된 노란빛의 나무는 내 시선을 바로 빼앗아갔다. 출발하기 전에 아무것도 없는 길에서의 그 기분과 나무들을 본 지금의 기분은 정말 사뭇 달랐다.


 중간에 우리는 한 바르에 들어가서 쉬기도 했다. 각자 마실 것을 시키며 쉬고 있는데 한 아저씨께서 우리 테이블을 빤-히 쳐다보았다. 카운터 석에 앉은 그의 눈빛이 느껴질 만큼이었는데, 알고 보니 벽에 걸린 모나리자 그림과 내가 닮았어서 쳐다본 것이었다. (후에 우리가 나갈 때, 나보고 모나리자랑 닮았다고 말을 해주시던.. 신기해서 그렇게 쳐다보았나 싶었다) 아무튼, 생각보다 별 거 아닌 이유였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나였다.


문제의 모나리자


에너지를 충전했으니 다시 걸어야 할 때였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니 먹구름은 온데간데없었고 따사로운 햇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내 생각보다 오늘의 나의 발걸음은 가벼워서 걷는 맛이 있었다. 날씨도 좋고 발걸음도 가벼우니 앞으로 쭉 뻗은 길을 시원하게 걸어갔고 약간의 경사진 곳을 올라가자 예상치 못한 풍경이 나와서 정말 깜짝 놀랐다.


Fromista 순례길


어떻게 이런 곳에 이런 풍경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고 그 순간 너무 황홀했다. 오른쪽으로 길게 난 수로와 그 주변에 있는 황금빛의 나무들이 햇빛을 받아 더욱 빛이 나고 있었다. 그런 길이 프로미스타 마을까지 쭉 이어졌고 살짝 해가 지려고 하는 시간에 도착한 우리들은 마을 초입 벤치에 앉아 가만히 풍경을 바라보았다. 너무도 아름다운 프로미스타 순례길이었다.


Fromista

우리는 이번 숙소인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해서 씻고 근처 레스토랑으로 가서 H오빠와 같이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또한 그곳 사장님께서 직접 담그신 술도 마시며 행복한 저녁을 보내고 잠을 자기 위해 숙소로 들어갔다.


자, 여기까지는 너무 좋았다.


문제는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방과 방의 구분이 없었던 다인실 알베르게인 이곳은 여러 순례자들의 코골이의 향연이었다. 언니들 중 코골이에 예민한 언니가 있어 안 그래도 걱정을 하고 있던 차에 결정타를 날린 사건이 하나 터졌다.


야심한 시각 갑자기 종이 울렸다. 나는 속으로 '지금 시간에도 종이 치나?' 하고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종이 많이 울리는 거였다. 심지어 그 종소리가 너-무 커서 귀가 정말 아팠다.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나가서 얘기를 해야 하나? 등 여러 가지 생각이 들 때, 참다못한 누군가가 나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이미 시간은 자정을 넘었고, 잠이 깬 나는 핸드폰을 보니 언니들의 카톡이 쌓여있었다. 우리들 중 언니 2명은 그 소리에 잠을 못 자서 한 층 아래인 부엌으로 피신해 있었고, 거기에 나도 동참을 하기로 했다. 조심스럽게 내려간 부엌에서 우리는 티를 마시며 얘기를 나눴는데 거기서 나는, 밤새 울리는 종소리가 알고 보니 초인종 소리였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늦은 시각, 모든 순례자들이 잠을 청하는 시간에 만취한 어떤 사람이 우리 알베르게의 초인종을 계-속 눌렀던 것이었다. 처음엔 다들 자거나 아님 무시를 했었는데 그 사람이 끊임없이 벨을 누르니 도저히 안 나갈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안에 있던 어떤 순례자분께서 결국 문을 열어주셨다.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비틀거리면서 양쪽 벽을 짚고 왔다고..)


암튼 그렇게 한바탕의 소동이 끝나고 모두들 피곤한 기색으로 다음 날을 맞이했다.


Fromis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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