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살 막바지에 떠난 산티아고 순례길
22/11/02 수요일 Walking D+13 & Stayed 1(Logroño)
Burgos(부르고스) -> Hontanas(온타나스) 약 30km
청명한 날씨란 바로 이런 것?! 11월이 되니 바람은 차가워져 비로소 가을 날씨를 피부로 느낄 무렵, 우린 다음 목적지인 Hontanas(온타나스)로 떠났다.
보통은 온타나스보다 조금 더 가서 쉰다고들 하는데.. 우리는 우선 온타나스까지 걷기로 했다.
30km의 거리는 이젠 나에게 보통의 거리가 된 지금, 그동안의 걸음으로 인해 더러워진 배낭을 메고 크디큰 부르고스를 빠져나갔다. 대도시들의 특징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아마도 땅의 면적이 아닐까 한다. 넓어서 좋지만 너무 넓어서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이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좋은 날씨와 평지라는 점이었다.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는 여유도 생겼다. 나뭇잎들이 점점 노란색으로 변해가고, 바닥엔 낙엽들이 제법 쌓인 날이었다. 곳곳에 보이는 노란 조개모양과 노란 화살표를 따라가니 점점 도시의 모습은 사라져 가고 너무나 익숙한 순례길이 나오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도시를 빠져나오는데 누가 갑자기
"부대다, 부대!"
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순간 부대찌개가 여기에?라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알고 보니 부르고스 대학교(Universidad de Burgos)를 줄여 말한 것이었다. 이로써 *나대(Universidad de Navarra)에 이어 부대까지 총 2개의 대학교를 순례길에서 마주치게 된 우리였다.
부대를 지나자 곧이어 자갈길의 순례길이 등장했다. 아직까진 평지의 길이라 하하호호하며 걸었는데 그러다 보니 어느새 501km라고 적힌 순례길 비석을 만나게 되었다. 이 비석은 현재위치로부터 산티아고까지의 남은 거리를 알려주는 이정표 같은 것인데, "501"이란 숫자를 보니 새삼 많이 왔구나- 하고 생각이 들었고, 특히 오늘 온타나스까지 가면 앞자리 수가 5에서 4로 바뀐다는 사실이 너무 신기했다.
우리는 501비석을 지나서 있는 작은 놀이터에서 잠시 쉬기로 했다. 아무도 없는 놀이터는 순례자인 우리가 쉬기에 안성맞춤 그 자체였으며 몇 개 없는 놀이기구는 지루함을 달래기에 충분했다. 그러다 전에 만났었던 H오빠를 보게 되었다. 놀이터에서 쉬고 있는 우리와 그 옆을 지나가던 H오빠.. 분명, 우리가 앞서서 출발했는데 그새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그만큼 우리가 오래 쉬었던 탓일까? 하는 생각을 하며, H오빠를 먼저 보내고 뒤이어 우리도 일어나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길게 쭉 뻗은 도로와 자갈길이 공존하는 순례길을 부지런히 걸어 다음 마을인 Tardajos(타르다호스)에 도착을 했다. 우리는 커피도 마실 겸, 화장실도 갈 겸 한 바르를 들렸고 그곳에 있는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다. 흰 커피잔에 담긴 따듯한 라떼와 따사로운 햇빛이 우리 쪽을 비춰서 더욱 행복하고 나른했다. (따듯한 라떼가 속을 데워주어서 너무 좋았다)
그렇게 행복한 기분을 가지고 다시 이동을 했는데 얼마 안 가 나의 그 행복감을 망쳐버릴 큰 언덕이 나왔다.
시작부터 올라가는 언덕에 나는 또 언니들과 멀어졌다. 내 체력이 이것밖에 되지 않나? 나는 왜 힘들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차피 올라야 할 언덕이고 그 끝엔 나를 기다리고 있을 언니들을 생각하니 다시 힘을 내보자! 하고 열심히 주문을 외우며 올라갔다.
"난 할 수 있다. 난 올라갈 수 있다!!!"
중간중간에 위에서 내가 잘 오고 있나 걱정해 주는 언니들이 있었기에 참 고마웠던 언덕길이었다. 천천히 올라가 어느새 제법 높이 올라왔다고 생각이 들을 때쯤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저 멀리 마을이 너무나 작게 보였고 우리가 걸어온 길도 한눈에 보여서 여러모로 뿌듯한 걸음이었다. 위에서 기다리고 있던 언니들과 만나고 물도 마시고 코도 풀며 다시 재정비를 했다. (이때까지 콧물이 나왔었다)
나름 큰 고비를 넘기고 다시 평지의 순례길로 돌아왔다. 계속 걷고 걸어 어느 조용한 벤치에서 잠시 쉬었다. 사방으로 탁 트인 풍경에 조용히 부는 바람을 느끼며 평화로운 그 순간에 점점 빠져들었다.
유난히 날씨가 좋았던 날이었고 슬슬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었다. 우리는 점심으로 먹을 메뉴를 정하고 그 식당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걷는 목적이 있으면 없던 힘도 생기는 법. 점심 메뉴를 생각하며 식당이 있는 마을까지 도착을 했는데, 아니 글쎄 식당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가뜩이나 지나가는 사람도 많이 없었고 식당 자체도 안 보여서 정말 멘붕이었다.
꼼짝없이 굶어야 하는 상황에.. 다음 마을로 그냥 가자니, 거리도 꽤 멀었고 식당이 있는지 조차 장담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그냥 어떻게든 이곳에서 점심을 먹어야 했었다.
식당 밖엔 야외 테이블이 있어서 장사를 할 것처럼 생겼는데, 문은 닫혀 있었다. 근데 또 안에선 음악소리가 들렸다. 정말 아이러니한 상황에 식당 문 앞을 서성거리며 기웃거렸는데,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앞치마를 두른 한 언니가 식당에서 나와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앞치마를 두른 걸 보니 이곳 직원임에 틀림없어서 우리는 사정을 말하고 지금 문 연 식당이 있는지? 혹시 가능하다면 이곳에서 먹을 수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그러자 언니의 대답 왈,
"이 근처 식당은 우리밖에 없어~"
그 말에 큰 상심을 한 우리였다.
근데..!
"내가 지금 준비되는 메뉴가 있는지 한 번 물어볼게~"라고 하는 것이었다. (할렐루야)
그렇게 언니는 식당 안으로 들어갔고, 그녀를 기다리는 마음은 몹시 초조했다. 여기가 아니면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조금의 기다림 끝에 언니가 나왔고 그녀는 우리에게 다가왔다.
"맥주는 가능해~"
와, 맥주라니. 맥주가 어디야 라는 생각에 우리는 부리나케 테이블로 가서 바로 앉았다. 그녀는 식당이 아직 오픈 전이라 요리할 준비가 덜 되어있었다고 설명했다. 정말 감사한 마음으로 맥주를 받았고 조금씩 마시면서 쉬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그녀가 우리에게 오더니, 햄버거가 주문이 가능하다고 하는 것이었다. 순례자의 운이 여기서 나오는 걸까? 안 그래도 배고픈 우리는 당장 햄버거 4개를 주문했고 맛있고 배부르게 점심을 해결할 수 있었다.
정식오픈 전임에도 불구하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어서 너무 감사했고, 후에 나도 다른 누군가에게 선뜻 호의를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한 날이었다.
든든하게 점심을 먹고 출발한 하늘은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온타나스까지는 그다지 멀질 않았고 중간에 별도로 쉼 없이 계속 직진했다. 그러다 477,7km의 비석도 보았다. 드디어 5가 깨졌구나!라고 감탄하며 더 힘차게 마지막까지 숙소가 있는 온타나스로 걸어갔다.
숙소는 온타나스의 완전 초입에 있었는데, 정말 실소가 나오는 위치였다.(나의 일기에 이렇게 적혀있다)
허허벌판 한가운데 떡하니 있는 숙소는 나름의 운치가 있어 낭만적이었다. 차례로 숙소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호스트가 한국어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기분 좋은 인사와 함께 방을 배정받은 우리는 깨끗이 씻고 저녁을 먹으러 다이닝룸으로 이동을 했다. 운이 좋게도, 이 숙소엔 우리밖에 없었고 덕분에 저렴한 가격에 전세를 낸 듯이 편하게 묵을 수 있었다. (호스트 왈, 며칠 뒤면 이 알베르게도 문을 닫는다고 했다)
호스트가 직접 만들어주는 맛있는 저녁과 디저트를 먹고 오늘의 밤을 진한 술로 달래며, 고단하고 재밌는 하루를 갈무리했다.
*나대(Universidad de Navarra) : [순례 4일 차, 용서의 언덕을 넘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