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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륭짱 Jan 12. 2023

순례 12일 차 :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라면

26.9살 막바지에 떠난 산티아고 순례길


22/10/31 월요일 Walking D+11 & Stayed 1(Logroño)

Belorado(벨로라도) ->  Atapuerca(아타푸에르카) 약 30km


어느덧 10월의 마지막 날이다.

이제 막 걸은 것 같은 느낌인데, 벌써 12일이나 흘렀다니.. 새삼 시간이 빠르다고 생각이 들었다.




전 날, 적게 걸어서 오늘은 많이 걷기로 했다.

우리는 적게 걷는 날이 있으면 항상 다음 날은 조금 더 걸어 밸런스를 맞추고자 했다.


오늘 걸을 거리는 약 30km의 꽤 짧지 않은 거리였다. 난 나의 체력을 알기에 배낭을 동키(Delivery Service)로 보냈는데, 덕분에 걷는 게 많이 힘들진 않았으나 발에 크게 잡힌 물집 때문인지 초반에는 발이 엄청 무거웠었다.


한걸음 한걸음 발을 떼기가 쉽지 않았고, 특히 걸을 때마다 왼쪽 발목부터 종아리까지 통증이 있어 너무 아팠다. 이 통증만 없으면 나름 괜찮았는데 갑자기 생긴 통증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나는 순례길 동안 내내 통증을 참으며 걸었다.


심한 안개 속 K언니와 나


오늘은 유독 날씨가 많이 안 좋았다. 걷다가 비도 왔고, 앞이 안 보일 만큼 안개도 자욱해서 꽤나 고생을 했다. 그러다 중간에 걷다가 날씨가 더 안 좋아지면 택시를 타자고 했었다. 하지만 우리들은 끝까지 두 발로 걷고 싶은 마음이 강해서 고민 끝에 택시를 타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대로 택시를 타게 되면 남은 거리가 너무 아까웠고 아직 체력도 있어서 날씨의 운을 믿어보기로 한 거였다!


그렇게 아침부터 안갯속을 걸었다. 


아침을 못 먹은 채로 6km 정도를 걸으니 배가 많이 고파왔다. (이것이 바로 공복 유산소???) 

우리는 아침을 먹을 만한 곳을 걸어가면서 찾아봤는데 도저히 보이지가 않았다. 배는 고프지, 날씨는 안 좋지, 발은 아프지.. 다들 힘이 든 채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을 때, 정말 한 줄기의 빛처럼 우리 앞에 큰 바르가 나타났다!


하지만 아직 좋아하긴 이른 법. 문이 열려있는지 확인을 해야 했다.

(제법 큰 바르는 들어가는 입구도 멀었다) 



"제발 열려있어라.. 제발..."


나무로 된 문을 끼익-하고 밀었는데.. 안으로 밀렸다! 그 뜻은 오픈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오픈을 확인한 후에, 한시름 놓은 우리는 바로 자리를 잡았고 각자 먹고 싶은 것을 주문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모든 순례자가 이 바르에서 쉬고 있었던) 


나무로 된 이곳 바르는 남사장님 한 분께서 주문부터 서빙, 요리를 모두 담당하고 계셨는데 우리말고도 모든 순례자들이 다 여기로 와서 그런지 무척 바빠 보이셨다. 주문도 많고 사람도 많아서 정신이 없을 법 한데, 끝까지 친절하게 맞아주신 사장님이셨다. 

우린 그곳에서 맘 편안히 아침을 먹었고, 비상식량(과자, 초콜릿 등)도 추가로 산 후 다시 길을 떠났다.

(사장님 덕분에 따듯하게 쉬고 아침도 먹을 수 있었던 이곳은 진정한 사막의 오아시스!!)

      

바르 & 아침 토스트


휴식도 좀 했겠다, 배도 좀 부르겠다 열심히 걸어갔다. 


사실 난 오늘 조금 긴장을 했는데, 그 이유는 바로 Oca산을 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산이라면 지레 겁부터 먹고 오르막에 취약한 나였기에 오늘은 또 얼마나 올라가려나 싶었다. 오카산 입구도 도착하지 않았는데 잔뜩 겁을 먹은 나였다. 이런 근심을 들은 언니들은 나를 위해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많이 힘들지 않을 거라고 한 마디씩 든든한 응원을 해주었다.


아침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각이었지만, 우리는 점심을 먹었다. 산에 올라가면 뭐가 없고 그대로 12km를 내리 걸어야 했기 때문에 오카산에 오르기 전에 배를 채우기로 했다. (있을 때 먹어둬야 한다) 베이컨이 든 샌드위치와 음료로 점심을 해결하고 드디어 오카산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오카산에서


마음은 근심으로 가득 찼지만, 힘든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다행히도 이런 걱정스러운 마음이 싹 없어질 만큼 오카산은 별로 어렵지 않은 산이었고, 오히려 아침보다 수월하게 걸을 수가 있었다. 키가 큰 나무들로 둘려쌓여진 오카산에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다. 숲 한가운데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니 더할 나위 없이 기분이 좋았고 행복했다. 다만, 기쁨도 잠시뿐 저 멀리서 한 오르막 길이 보였는데 그 경사가 거의 90도 가까이 되는 것 같아 순간 공포심이 밀려왔다. 


"에이~ 아닐 거야. 저 길을 올라가라고? 설마.. 아니겠지~."


서로 90도의 그 길을 애써 모른 척했다.


정녕 저게 길이란 말인가???

그치만 모른척할 수 없었던 현실이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길을 향해 갔는데, 정말 다행히도 약간의 오르막은 있었으나 길이가 굉장히 짧았다. 


그렇게 공포의 90도 길을 넘어서자 평탄한 길을 걸을 수 있었다. 물론, 중간중간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었지만, 걷기 힘들 정도는 아니었다. 


어느 정도 걸었을 때, 우리는 한 번 쉬어주기로 했다. 조금 더 걸어가자 앉아서 쉴 수 있는 적당한 쉼터를 발견했는데, 그곳엔 저번에 마주친 프랑스 순례자가 있었다. 우리를 기억하고 있던 그 순례자와 반갑게 인사를 한 후 벤치에서 초콜릿과 사촌언니가 가져온 와인을 마시며 휴식을 취했다.


오카산의 어느 쉼터


오락가락하는 날씨 속에서 얼마나 우비를 입고 벗었는지 잘 모르겠다. 우비를 입고 벗는 것이 조금은 성가시지만, 우기인 10월의 순례길에서는 우비가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필수품임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당도 충전하고 충분히 쉰 우리는 오카산을 넘어 다음 마을로 이동했다. 


끝없이 펼쳐진 나무와 흙길을 따라 화살표가 안내해 주는 방향으로 내려가니 오카산이 싱겁게 끝나버렸다. 너무 걱정했던 오카산이었는데, 그런 걱정이 무색할 만큼 평이하고 쉬운 산이었다. 오카산을 다 하산하자 얼마 안 가 한 바르가 있었다. 그곳에서 쉴 겸 들어가니 산에서 마주친 순례자들이 먼저 하산해 그곳에서 쉬고 있었다. 역시나 그곳엔 프랑스 순례자도 있었다! 


나란히 형형색색의 우비를 입은 우리들이 바르에 들어가니 모두들 박수를 쳐주었다. 그 박수를 받으니, 왠지 모를 뿌듯함과 민망함이 느껴졌다. 


나름의 큰 고비를 넘자 나는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밖에 있는 의자에서 따듯한 코코아를 마시며 다른 순례자들과 잠깐 얘기도 나누었고 프랑스 순례자와도 짧은 대화를 했다. 유쾌하기 그지없는 그분은 우리의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고 그분 덕분에 4명이서 찍은 사진도 건질 수 있었다. 


프랑스 순례자분께서 찍어준 우리 / 왼쪽부터 사촌언니 B언니 K언니 그리고 나


잠깐이지만 달콤했던 휴식이 끝나고 이제 아타푸에르카로 정진해야 했다. 점점 흐려지는 날씨와 갑자기 떨어지는 비에 후다닥 우비를 쓰고 계속 걸어갔다. 마을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지만 그 길이 정말 힘들었다. 언니들은 이 힘듦을 춤으로써 승화하면서 K-POP에 맞춰 춤을 추며 걸어갔다.


우리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마약은 음악이라고 했던가.


비도 오고 날씨도 흐린 와중에 춤을 추며 걸어가는 언니들을 보니, 난 그저 춤을 출 수 있는 체력이 남아있다는 것에 놀라울 뿐이었다. 힘들지만 각자 나름대로 즐거움을 찾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신나게 춤을 추다 보니 어느새 마을 입구에 도착을 했고, 숙소에 금방 들어갈 수 있었다.


이번엔 4인실이 아닌 알베르게에서 하루 묵기로 했었는데, 마치 일본의 캡슐호텔처럼 된 구조여서 신기했다. 

나름 1인 베드로 편안하게 잘 수 있었지만, 간격이 좁아 서로의 코골이를 들을 수밖에 없는 단점이 있는 알베르게였다.


2층 침대인 나는 왼쪽에 커튼이 있었으며 침낭을 깔고 잤다!


비에 젖은 우리는 빠르게 씻고 나와 저녁을 해 먹었다. 신기한 구조의 이 알베르게는 2층에 부엌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저번에 마주친 한 미국인 순례자와 마주쳤다. 그분의 전 와이프가 한국인이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같은 한국인인 우리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유창하지는 않지만 웬만큼 한국어를 알아듣는 것 같았던..!)

덕분에 재밌는 에피소드도 생기고 참 여러모로 신기한 인연 같았다.


독특하지만 따듯한 알베르게와 우리들의 저녁거리
라면에 밥말


라면을 저녁으로 먹은 우리는 냄비로 밥까지 해서 국물에 말아 싹싹 먹었다. 

비 오는 날 열심히 걷고 깨끗하게 씻은 후 하루를 마무리하며 먹는 라면이란 말할 것도 없이 정말 정말 맛있었다. 저녁과 함께 서로 고생했다는 말을 끝으로 또 다른 시작인 내일을 위해 우리는 일찍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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