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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륭짱 Jan 05. 2023

순례 10일 차 : 호세 할아버지

26.9살 막바지에 떠난 산티아고 순례길


22/10/29 토요일 Walking D+9 & Stayed 1(Logroño)

나헤라(Najera) -> Redecilla del Camino(레데시아 델 카미노) 약 30km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30km를 걷는다. 연속 30km라... 조금은 고단할지 몰라도 30km 뒤엔 멋진 알베르게가 있다고 하니 속는 셈 치고 걸어보는 나였다.


30km나 되는 거리여서 배낭을 동키로 보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제의 여파로 나의 걷는 속도가 다소 느렸다. 이게 꽤나 서글플 수가 없었다.


새벽부터 나와 깜깜한 길을 걸었다.


그 깜깜함은 점점 색이 빠져 밝아짐을 준비하고 있었다. 구름은 많지만 날씨는 참 좋았다.


여기서 할 게 뭐가 있겠느냐, 그저 걷는 것뿐이었다.

난 비록 뒤에 있었지만, 묵묵히 내 속도로 걸어 나갔다.


오늘 걷는 길은 평탄하지만 자갈이 많은 길이었다. 신발 사이로 들어오는 자갈과 이미 자리를 잡은 물집들이 발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걷는 속도가 제각기 다른 우리들은 어느새 한 명 한 명 떨어져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많이 지쳐갈 때쯤 한 스페인 순례자분이 내게 말을 걸었다.

그저 그런 평범한 이야기였는데, 같이 얘기하며 걸으니 왠지 모르게 힘이 나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한국에서 왔고, 영어를 잘 못 한다.

그분은 스페인에서 왔고, 영어를 잘 못 한다.


서로 영어를 못하니까 대화하기가 더 수월했고 부담감이 덜 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길과 약간의 오르막을 같이 걸으면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눴다.


아마 혼자 뒤에서 걸었으면 더 힘들고 쳐져있었을 덴데, 그분 덕분에 앞서가던 동행들과 합류할 수 있어서 고마웠다. 오르막을 다 올라가고 다른 마을에 들어설 때, 나는 언니들과 다시 만날 수 있었고, 거기에 합류한 나는 자연스럽게 그분과 헤어졌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슬슬 배가 고파왔다. 다행히 샌드위치를 파는 바르를 발견해 바로 들어갔다.

먹음직스러운 샌드위치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고, 그것들은 나의 배를 자극시키기엔 너무나 충분했다.

샌드위치 1개와 환타 1개를 시켜 먹었는데, 너무 맛있어서 샌드위치 1개씩을 더 먹었다.



그렇게 동양인 여자 4명이서 샌드위치 8개와 음료 4잔을 먹고 조금의 휴식 끝에 다시 출발했다.


똑같은 길에 똑같은 풍경.


약간은 지루할 수 있지만, 조금씩 걸으며 나오는 개성 넘치는 바르와 세계 곳곳에서 오는 순례자를 만나면 지루함도 버틸 수 있는 것 같다.


로그로뇨에서 하루 쉬었더니 처음 보는 순례자가 꽤 많았다. 일정이 하루만 바뀌어도 만나는 사람들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구나- 하고 실감을 하던 날이었는데.. 한 번은, 프랑스에서 오신 순례자분을 만났다.


이분은 마치 해리포터에서 나올법한 두꺼운 나무지팡이를 항상 가지고 다녔는데, 그분의 신장처럼 나무지팡이가 길쭉길쭉했다. 프랑스 순례자는 엄청 유쾌하셨고 쾌활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전형적인 인싸.. 랄까?)


모든 순례자가 그분을 알았으며 친구도 꽤나 많아 보였다.


잠시 휴식을 하며 프랑스 순례자와 같이 살룻- 건배도 했다. 비록 난 오렌지 주스 였지만 말이다.


오렌지 주스로 당을 채우고 마지막 도약을 했다.

빨리 가고 싶었고 빨리 쉬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는 길을 개척해 갔는데, 길을 잘 알고 있는 사촌언니가 앞장서 우리를 이끌었다.


푹푹 빠지는 발에 끝도 없이 펼쳐진 이름 모를 밭을 걸으며 이 길이 맞나? 싶었다.

걸어온 길을 보니 생각보다 꽤 와서 도로 무를 수도 없었다.



사촌언니를 믿으며 계속 걸은 끝에 드디어 우리가 가고 싶어 했던 Redecilla del Camino(레데시아 델 카미노) 마을에 있는 알베르게에 도착을 했다!


힘들게 도착한 이 알베르게는 호세 할아버지께서 혼자 운영을 하고 계신 곳이었는데 마을 자체가 크지 않아서 조용한 시골 느낌이었으며, 특히 알베르게 대문 앞 놀이터가 더욱 귀엽게 느껴진 곳이었다.


Albergue Essentia


사실, 메인은 이것에 있었다.

바로 호세가 직접 만든 저녁 코스 요리인데, 이곳에 묵는 순례자들 중에서 저녁 식사를 신청한 사람만 먹을 수가 있었다. 10유로의 다소 저렴한 가격이어서 신청을 안 할 수가 없었고 평점도 너무 좋아서 기대가 많이 되었다. 순서대로 스프와 본식, 디저트가 나왔고 주인장인 호세가 직접 배식을 해주었다. (혼자서 순례자를 받고 요리도 하며 배식까지..!)


스프 - 파스타
배식받은 파스타와 애플파이

호세가 만들어준 저녁요리는 너무나 맛있었다. 특히 마지막으로 나온 후식 애플파이가 진짜 맛있었다.


큰 식탁에는 이탈리아에서 오신 분과 프랑스에서 오신 분들이 계셨고 조금은 조용하지만 너무 떠들썩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천천히 저녁을 먹었다. (우리는 그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고 후에 얘기를 나눴었다ㅎㅎ)


저녁을 먹으면서 약간의 대화도 했다.


여기서 상당히 흥미로운 얘기가 나왔는데, 보통 우리들은 순례길을 한 번 오면 기간이 길어지니 퇴사를 하거나 은퇴 후에 오는 사람들이 많은데 유럽인들은 그렇지 않고 일하면서 짧게 짧게 와서 순례를 한다고 했었다.

그러면서 이걸 위해 퇴사한 우리를 굉장히 놀라워했다. (사촌언니 제외하고 나머지 다 직장을 그만두고 온 상태였다)


다시 돌아가면 어떻게 일을 할 거냐는 질문에는 K언니가 재치 있게 대답을 했다.


"우리는 아직 젊으니까 다시 구하면 돼요!"


너도나도 순례자분도 다 빵 터지며 맞는 말이라고 말씀을 해주셨다.


식사를 마친 후에 약간의 담소도 더 나누며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은 행복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던 호세의 알베르게에서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같이 식사를 함께 한 순례자분들과 호세 & 개성있는 방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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