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좋은 추억을 가지고 아침 일찍 떠난 오늘. 편안한 숙소에서 푹 쉬었더니 몸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하루는 걷지 않고 오롯이 쉬었으니, 푹 쉰 다음날인 오늘은, 30km를 걷기로 했다. 오늘은 바로 나헤라(Najera)까지 걷는 날이다!
앞자리가 바뀌어 걷는 압박감이 조금 있었다. 그래서 원래 동키(Delivery Service)를 보내려고 했으나... 예상치 못하게 동키 서비스가 안 되어 배낭을 못 보내는 상황이 생겨버렸다. 돈만 주면 동키서비스를 해줄 거라는 나의 단단한 착각이었다. 아무튼, 그래서 몸은 상쾌했으나 마음은 조금 당황스러운 아침을 맞이한 채, 무거운 가방을 다시 메고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시각에 다 같이 길을 나섰다.
여러 변수가 존재하는 순례길. 내가 할 일은 그저 묵묵히 걷는 것뿐이었다.
큰 도시에 머물렀기 때문에 길을 빠져나가는 것도 일이었다. 또한 길을 걸어가면서 아침을 먹을만한 곳도 찾아보았는데 이른 시각이라 문을 연 곳도, 마땅한 식당도 찾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하염없이 걸으며 큰길을 어느 정도 빠져나왔을 때, 구글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작은 동네 빵집이 보였다. 다행히 그곳은 문을 열었고 운 좋게도 커피도 같이 판매를 하고 있었다.
있을 때 먹어둬야 한다!
는 우리의 신조답게 불이 켜진 것을 보자 바로 그곳으로 들어갔다.
매장은 작았으며 테이블과 의자는 따로 없었다. 즉, 사가지고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 시각에 빵을 판매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서 일단 우리는 빵부터 고르기 시작했다. 크로와상 2개와 뺑오쇼콜라 2개 커피 4잔을 주문한 후 받아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생각보다 큰 빵에 너무 놀랐다. 심지어 빵 2개에 1.7유로라니... 극강의 가성비를 자랑하는 동네 빵집이었다. 매장 안 취식이 안 되기 때문에 우리는 길에 있는 벤치에 나란히 앉아서 빵을 나눠 먹었다. 다행히 벤치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으며, 아침으로 커피와 빵을 든든하게 먹은 후 본격적으로 걸었다.
극강의 가성비를 자랑하는 이름모를 빵집
주변을 둘러싼 나무들이 참 많았다.
얼마쯤 걸었을까.. 쭉 뻗은 길에는 러닝 하는 사람들, 산책하는 사람들, 순례자들이 속속들이 보였고 주변 나무들 사이로는 청설모들이 재빠르게 뛰놀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청설모를 본 적이 난생처음이었다.
그렇게 구경을 하며 걷고 있다가 한 할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말을 건네셨다.
"빵을 조금만 떼주면, 청설모들이 더 가까이 올 거야"
그 말을 들은 K언니는 가방에서 비상식량으로 있던 작은 빵을 꺼내어 먹기 좋은 작은 크기로 떼었다. 난 정말로 이 작은 친구들이 빵을 먹으러 올까? 하고 의구심이 들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빵조각을 먹으러 청설모가 우리 곁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이 친구가 어찌나 빠른지 작은 손으로 빵조각을 받아먹고는 이내 나무 사이로 사라져 버렸지만 특별한 경험이었다.
나무를 따라 쭉 이어진 아스팔트 길과 강을 따라 이어진 돌길을 지나 계속 걸었다. 그러자 한 공원 입구가 나왔다. 중간중간에 공원을 지나면서 다양한 동물들과 순례자도 만날 수 있어서 즐거운 마음으로 가득했던 길이었다.
청설모가 제법 큽디다..?
쉬지 않고 걸어온 우리들은 한 마을에서 점심을 먹으며 쉬기로 했다. 어디로 갈까- 하며 주변을 둘러보는데, 모든 순례자들이 하나같이 한 바르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걸 발견했다. 바깥 테라스에 앉아 담배를 태우며 휴식을 취하는 순례자와 와인과 빵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는 순례자 무리들이 많았다. 마침 자리도 있고, 주변에 딱히 뭐가 없는 것 같아서 우리도 순례자 분들과 함께 이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나는 하몽이 올라간 하몽토스트와 콜라를 주문했다. 힘을 내려면 고기를 먹어줘야 한다는 무의식이 하몽 토스트를 주문하게 만들었다. 익숙하지 않은 담배연기와 오랜만에 듣는 조잘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점심을 먹으니 생각보다 재미있었고 평화로웠다.
자, 이제 다시 짐을 챙겨 나갈 시간이다. 밥도 먹었고! 화장실도 갔다 왔고! 우리는 앞으로 움직일 일만 남은 것이었다. 배낭을 메고 최종 목적지인 나헤라로 바삐 움직였다. 발을 아프게 하는 자갈밭을 지나 우두커니 있는 작은 정자에서 쉬기도 했고, 내 앞으로 끝없이 펼쳐진 포도밭을 지나 당이 떨어져 비상식량으로 가져온 빵을 먹기도 했다.
걷고 먹고 쉬고의 반복 끝에.. 드디어 나헤라에 도착을 했다. 멋진 다리만 건너면 바로 우리가 묵을 알베르게가 있어서 힘을 내 열심히 걸어갔다.
도로 옆에 바로 있는 알베르게 문을 열고 조금의 계단을 내려가니 스텝분이 친절하게 맞아주셨다. 난 도착하자마자 배낭을 바닥에 두고 숨을 골랐다. 다른 공립 알베르게와는 다르게 귀여운 장식들로 내부가 잘 꾸며져 있었고 멋있었다. 많은 공립 알베르게를 가본 건 아니었지만, 지금까지 가보았던 곳 중에서는 이곳이 최고였다.
우리는 체크인을 마치고 신발을 벗은 후 그를 따라 한 층 올라갔다. 계단은 오래되었는지 연신 삐그덕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위층으로 올라가자 그는 자세한 설명과 함께 방 배정을 해주었고 우리 옆 방 침대엔 다른 순례자분이 묵고 있다고 추가적인 말도 덧 붙였다.
옆방 순례자는 귀가 들리지 않는다면서, 우리 보고 알고 있으면 좋을 것 같다고 표정과 손짓, 제스처 등을 쓰면서 말해주었다. 그의 배려심 깊은 모습에 모두가 감탄한 순간이었다.
이 알베르게엔 다양한 국적의 순례자분들이 많이 계셨고 그중에 한국인 여성분도 계셨다. 한국인을 만나니 새삼 반가울 수가 없었다.
배정받은 방에서 짐을 풀고 저녁을 먹으러 공용 식당으로 내려갔다. 이곳에는 주방이 없어 요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가 가져온 라면으로 저녁을 먹었고, 후식으로는 약간의 술, 과자와 함께 수다를 떨며 오늘의 행복한 밤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