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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륭짱 Jan 10. 2023

순례 11일 차 : One day

26.9살 막바지에 떠난 산티아고 순례길


22/10/30 일요일 Walking D+10 & Stayed 1(Logroño)

Redecilla del Camino(레데시아 델 카미노) -> Belorado(벨로라도) 약 12km


따듯했던 이곳 알베르게의 아침이 밝았다. 복도 한 끝에선 일찍이 떠나는 순례자들의 분주한 준비 소리가 사부작사부작 들려왔다. 우리만큼 늦게 혹은 여유 있게 출발하는 순례자는 없을 거란 생각과 함께 느긋한 아침을 맞이했다.


우리가 여유 있게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오늘 걸을 거리가 짧았기 때문이었다. 전전날과 전날 도합 약 60km가 넘는 거리를 걸어서 오늘은 조금만 걷기로 한 거였다. 

사람에 따라 12km의 거리가 길 수도 짧을 수도 있는데, 30km를 한 번 걷고 나니까 12km라는 거리가 비교적 짧게 느껴졌다. (점점 적응해나가는 나였다)

  

12km는 쉼 없이 걸어온 우리에게 주는 여유랄까... 부담감이 확 줄은 오늘이었다.




모든 순례자들이 나간 알베르게는 조용하며 한산했다. 그런 곳에서 우리는 아침과 점심을 만들기 위해서 주방으로 내려갔다. 

아침은 슈퍼에서 사 온 빵과 계란찜과 커피를. 

점심은 마요네즈가 듬뿍 들어간 참치 주먹밥이었다.


호세네 주방에서 아침과 점심을


호세가 어젯밤 우리를 위해 저녁식사를 만든 그 주방에서 우리는 오늘 먹을 아침과 점심을 분주히 준비하고 있었다. 그가 실제로 사용한 그릇과 주방용품들을 보니 기분이 참 묘했는데, 여기서 어제 먹은 맛있는 저녁이 탄생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이상하고 은밀한 감정이 든 나는 나도 모르게 묘한 기분에 잠깐 휩싸였다.


호세네 주방에선 사촌언니의 진두지휘하에 아침과 점심이 동시에 만들어지고 있었다. 렌지엔 계란찜이, 냄비엔 쌀밥이 맛있게 익어가고 있었다. 호세는 주방 옆을 슥- 지나가며 특유의 익살스러운 웃음을 지었고 이윽고 밖에 나가 친구와 수다를 떨었다. 

처음에 쎄요를 받았던, 어젯밤에 저녁을 먹었던, 큰 테이블이 있는 그 공용거실에 모여 우리는 아침 식사를 했다. 


아침과 점심을 모두 만드느라 시간을 꽤 쏟은 나머지 출발 시각이 조금 늦어졌지만, 크게 개의치 않고 우리가 끝까지 아침을 먹고 준비를 다 한 채 출발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준 호세에게 이 글을 빌려 참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Muchas gracias!)

그렇게 인정 많고 유쾌한 호세와 이별을 한 후, 벨로라도를 향해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했다.


 12km라 그런가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그 마음의 여유를 없앨 갑작스러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잠시 멈춘 채 서둘러 자신의 우비를 쓰고 다시 걸어갔는데, 웬 바르 하나가 보였다.


비도 오고 조금 쉴 겸 안으로 들어간 이 바르는 여느 다른 바르와는 조금 달랐다. 

바로 "기부제" 바르 & 알베르게였던 것이었다!

1층엔 바르, 2층은 알베르게를 같이 운영하고 있는 곳이었으며 이미 한 남자 순례자 분께서 아침식사를 하고 계셨다. 비가 내리길 기다리며 한 곳에 가지런하게 배낭과 우비를 놓고선 음료를 주문했다.

기부제니 가격은 순례자 마음이었는데 우린 각 2유로씩을 내었다. (※보통 음료들이 2유로씩 하며, 기부제 알베르게는 절대 무료가 아닌 점을 명심하자!)

다행히 짧게 있다가는 소나기여서 서둘러 움직일 수 있었다. 

다시 우비를 고이 접고 길을 나섰다.


기부제 바르에서


투박한 시골길을 따라, 바닥에 그려진 노란 화살표를 따라 계속 걸어갔다. 마을을 벗어나니 집은 한 채도 보이지 않았고 흙색의 풀과 밭뿐이었다. 사람이 많이 없는 순례길이었는데 앞에 가는 순례자들을 보면 어찌나 반갑던지.. 나 혼자 내적 친밀감이 상승한 날이었다.


순례자들


그렇게 앞서가던 순례자도 보고 우리끼리 발을 맞추며 걸어가는데 갑자기 산티아고 오픈채팅방이 한바탕 시끄러웠다. 처음엔 그 연유를 잘 몰랐으나, 멈춰서 카톡방을 천천히 읽어보니 한국 이태원에서 압사 사고가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난 그 얘기를 듣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발은 앞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순식간에 머리는 한국 이태원 소식으로 가득 찼다. (또한 난 위로 오빠 1명이 있기에 불현듯 오빠 생각이 저절로 났었다) 


우리는 걸으면서 각자 한국으로 연락을 시도했다. 특히나 남동생이 있는 언니들은 더욱 걱정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각자 가족들에게 연락을 취하면서 안부를 확인했다. 다행히 그곳에 간 사람은 없어서 큰 화를 면했지만 참 아찔하고 심장이 쿵- 떨어지던 순례길이었다.

(그때 당시 한국은 새벽이라, 난 바로 연락이 안 되었지만 추후에 연락이 닿아 안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언니들과 함께 걸으니 어느새 오늘의 목적지인 벨로라도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우리는 숙소에 들어가기 전에 점심을 해결하기로 했고, 적당히 좋은 벤치를 찾아 배낭을 풀고 호세네 주방에서 만든 참치주먹밥을 하나둘씩 꺼냈다. 참치주먹밥이 어찌나 큰지 손바닥을 펼친 것과 크기가 비슷했다.


이제 먹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여기서 제일 중요한 문제가 생겨버렸다.


바로 먹을 도구가 없는 것이었다.


다행히 사촌언니에게 나무젓가락이 있었고 덕분에 깔끔하게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은근 나무젓가락을 파는 곳을 찾기 힘드니, 비상용으로 몇 개 들고 다니는 걸 추천한다!! + 불닭 소스도)


벤치에서 참치주먹밥을


벤치에서 밥을 먹으며 우리 옆을 지나가는 순례자와도 마주쳤다. 저번에 한 번 인사를 한적 있는 한국인 순례자였는데 한 번 인사했다고 그새 친해진 기분이었다.


마요네즈가 가득한 참치뿐인 주먹밥을 든든하게 먹고 곧장 숙소로 향했다. 오늘 우리가 묵을 숙소는 벨로라도에 있는 한 호텔이었다. 4인실에 각 1인 침대가 있는 근사한 곳이었다. 빨리 체크인을 하고 들어간 우리는 짐을 풀고 저녁식사 전까지 각자 시간을 보냈다. 


점심을 일찍 먹은 탓일까? 저녁 시간이 다소 늦은 탓일까? 너무너무 배가 고팠었다. 모두 그 허기짐에 허덕이고 있을 때, 드디어 1층에 밥을 먹으러 내려갈 수 있었다. (정해진 저녁 시간이 있었다)

우리 방이 있는 곳은 2층이고, 레스토랑은 1층에 있었다. 테이블에 앉아 메뉴판을 보고 각자 먹고 싶은 것을 시켰다. 


그렇게 배고픔에 아무 생각도 없이 앉아있을 때쯤 갑자기 뉴스에 이태원 참사 속보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 먼 스페인 벨로라도에 한국 이태원 참사 소식이라니.. 새삼 큰 사건이었구나 하고 깨달았던 순간이었다. 또한 이 레스토랑에 방문했던 사람들도 한 마디씩 우리에게 이태원 참사에 대한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 이후로 스페인에서 이와 관련된 꽤 많은 뉴스를 접했고, 위로의 말도 많이 들었었다)



여러 복합적인 감정이 들었던 벨로라도로 향하는 그 길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날을 보낸 한국의 모든 분들께 위로의 말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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