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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륭짱 Jan 15. 2023

순례 13일 차 : 대도시의 맛

26.9살 막바지에 떠난 산티아고 순례길


22/11/01 화요일 Walking D+12 & Stayed 1(Logroño)

Atapuerca(아타푸에르카) -> Burgos(부르고스) 약 20km


10월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11월이 된 오늘, 우리는 대도시인 부르고스에 가기 위해 아침 일찍 나왔다.

나름 아늑했던 알베르게에서 피곤한 몸을 일으켜 일어나려니 조금은 힘든 아침이었다. 아직은 모두가 자고 있는 이른 시각에, 우리는 잠을 청했던 자리를 정리하고 조용히 밖으로 나왔는데 제법 공기가 쌀쌀해서 깜짝 놀랐다. 입김도 나왔던 그 새벽에 갑자기 날씨가 추워진 우리는 가지고 있던 옷을 단단히 입으며 차가운 신발을 꽉 동여매었다.


밤새 비가 내렸는지 밖에 있는 원목 테이블과 의자는 촉촉이 젖어있었다.


오늘 우리가 걷는 길은 약간의 언덕과 평지가 섞여있는 길이었다. 이젠 짧다고 느껴지는 20km인 순례길을 평온한 하늘 아래에서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했다.


알베를게에서 나온 후 마주친 하늘


저번부터 욱신거리는 다리는 여전히 무거워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내딛기가 힘들었다. 시작부터 언덕이 있는 부르고스행 순례길은 조금 힘들었고, 언니들보다 내가 많이 뒤처져 있었다. 아마 앞으로 한동안은 종아리를 쑤시는 고통에 시달리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발에 크게 잡힌 물집이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젠 물집에 익숙해져 버린 13일 차 순례자였다.


조금은 어둡고 습한 날씨 속에도 뚜벅뚜벅 잘 걷는 언니들 뒤를 따라서 나도 부지런히 걸었다. 너무 무리하지는 않고 내 페이스를 조절하면서 걸었고, 올라가다가 힘들면 멈춰서 숨을 돌리곤 했다. 멈출 때마다 언니들과의 거리는 조금씩 멀어져 갔지만, 멈춰 선 순간 나는 주위 풍경을 조금이라도 더 볼 수 있었다. 


마지막 약간의 경사진 곳을 오르고 뒤를 돌아보자 그동안 몰랐었던 멋진 풍경이 나를 반겨주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사진을 찍으며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었다.    


오르막을 오른 후에


평지가 아닌, 높은 곳을 올라갔을 때만 보이는 풍경이라, 올라가는데 조금은 힘들지라도 이 풍경을 보고 있자니 역시 올라갈만한 가치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스케이트장에서 연속으로 12바퀴 정도의 트랙을 탄 것과 같이 두 다리엔 힘이 많이 들어간 상태였지만, 그래도 꾸준히 걷다 보니 차차 괜찮아졌었다. 나는 그런 다리를 끌고 아침을 먹으러 한 마을의 카페테리아로 들어갔다. 아침을 못 먹고 처음부터 언덕을 오른 우리는 배가 몹시 고팠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이곳을 들어가기까지 아주 약간의 고민이 있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바로


"인종차별"


인종차별이 있다는 구글 리뷰 때문에, 들어가기가 좀 망설였으나 우리에겐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따로 있었다. 바로


"배. 고. 픔"


아침을 못 먹고 공복유산소를 한 우리였기에 인종차별이 있건 말건 일단 문이 열렸으니 들어가서 아침만 먹고 오자 했었다. 약간의 두려움을 가지고 들어간 카페테리아는 이른 아침에도 순례자들이 꽤 있었고, 맛있는 음식들이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우리는 빈자리에 가서 앉았고, 사촌 언니가 대표로 주문을 했다. 먹고 싶은 것도 많았고 사람 수도 꽤 되니 한 번에 주문을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 언니였다. 핸드폰 메모장을 켜서 커피와 메뉴를 적은 다음 사장님께 가져간 언니는 일사천리로 주문과 결제를 했고, 뒤이어 음식도 생각보다 빠르게 나오기 시작했다. (후에 사장님께서 이 방법을 좋아하셨다고 했고, 딱히 우리가 인종차별을 받은 느낌은 없었다)


진짜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과 배부르게 먹은 아침식사


따듯한 커피와 또르띠야 그리고 바게트를 든든하게 먹었다. 사장님 손이 크신지 음식들이 다 큼지막했는데, 결국 배부른 나머지 나는 바게트를 반 남기고 말았다. 다 못 먹은 바게트는 가지고 온 호일로 둘둘 말아 따로 챙겨 나왔다. 


아침을 먹으면서 배도 채우고 체력도 비축해서 그런지 전보다 걷기가 좀 수월해졌다. 추웠던 날씨도 오후가 되니 해가 떠서 살짝 더워지기까지 했다. 


그렇게 대도시로 향하는 어느 보통의 순례길이었다.


4명이서 같이 걷는 길은 참으로 든든했고 재미있었다. 걷다가 배고프면 같이 밥을 먹어주고, 걷다가 힘들면 같이 쉬어주는 언니들이 있었기에 부르고스로 가는 길이 외롭지 않았다.


어느 정도의 흙길을 벗어나 도시의 냄새가 나는 아스팔트 길을 걸었다. 그러다 재밌어 보이는 작은 놀이터를 발견했다.


"우리 여기서 잠깐 쉬었다 갈래?"


"좋아"



아무도 없는 작은 놀이터여서 편하게 쉬기에 너무 좋았다. 벤치에 앉아서 각자 휴식을 취했는데, 사촌 언니는 핸드폰을 했고, K언니는 발의 상태를 보며 바세린을 발랐으며, 나는 아침에 먹다 남은 바게트를 먹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카메라로 담은 B언니였다.


편안했던 조금의 쉼을 끝으로 다시 부르고스를 향해 걸어 나갔다. 저 멀리 부르고스 표지판이 보이는 걸 보니 이제 머지않아 도착할 것 같은 기분 좋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조금 더 걸어가니 고속도로가 나왔고 승용차들이 슬슬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도시에 들어선 것이었다!


부르고스는 도시 중에서도 대도시에 속하는 편이어서 우리의 숙소가 있는 곳까지는 더 걸어가야 했지만, 도시에 들어온 자체로도 나는 기분이 너무 좋았다. 물론, 지금까지 거쳐온 여러 마을들도 좋았지만.. 아무래도 비교적 도시가 인프라가 잘 되어있고, 먹을 것도 훨씬 많기에 나는 도시에 더 마음을 두게 되었다. 


도시다 도시!


어느 정도 부르고스에 들어온 것 같고 숙소 체크인 시간도 여유가 있어서 우리는 도시의 끝판왕인 맥도날드에서 잠깐 쉬기로 했다. 원래 버거킹을 가려다가 문을 닫아서 맥도날드를 가게 된 거지만, 아무렴 어떤가.


이미 난 도시에 왔는 걸!


각자 키오스크에서 주문한 후 편안한 쿠션감이 있는 4인 자리에 앉았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보니 큰 미끄럼틀이 있는 놀이방이 있었다. (실로 매장이 크구나 하고 느꼈던..)

어른인 내가 봐도 퍽 재미있어 보였던 놀이방을 뒤로한 채 나는 오레오 맥플러리를 먹었다. 이렇게 대도시의 맛을 뼈저리게 느끼고 나니, 더욱더 좋아진 부르고스에서의 맥도날드 탐방이었다. 


맥도날드에서 숙소 체크인 시간에 맞춰 움직였다. 그러나 아직 숙소 청소가 덜 되어있어서 결국 밖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는데 마침, 숙소 근처에 아시안 푸드를 파는 곳이 있어서 우리는 그 매장으로 바로 갔다.


걸어서도 갈 수 있는 짧은 거리에 있는 아시안 푸드 매장. 

화려한 네온과 정신없는 인테리어에 다소 놀랐다. 


아시안의 이미지란 뭘까..?
맛있었던 볶음우동


날씨가 좋아 테라스에서 다 같이 볶음우동을 시켜 먹으며 체크인 시간을 기다렸다. 비록 제시간에 숙소에 들어가진 못했지만 덕분에 맛있는 아시안 음식을 먹을 수 있었고, 끝으로 숙소에 무사히 들어가 배낭을 풀으니, 마음이 훨씬 편안해진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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