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다시 설계한다는 것

by Hwan

퇴사 이후의 삶에는 갑작스러운 공백이 생긴다. 그동안회사가 채워주었던 시간표가 사라지고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달력은 비어 있고, 할 일은 정해져 있지 않으며, 누가 나에게 목표를 제시하지도 않는다. 하루라는 공간이 온전히 나에게 돌아왔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해방감으로 다가오지만 곧 막막함으로 이어진다.


오랫동안 회사가 내 삶의 구조였다. 규칙적으로 울리는알람, 출근 시간, 점심시간, 회의 시간, 보고서 마감, 퇴근 시간, 틀 속에서 움직였고 스스로 하루를 설계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오늘을 어떻게 살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누구도 묻지 않았고 나도 묻지 않았다.


퇴사 후의 하루는 질문에서 시작된다. 원하는 대로 시간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 매력적이지만 그만큼 스스로를 잃지 않기 위한 자기 설계가 필요하다. 자유는 계획이 없으면 흐트러지고, 의욕은 패턴이 없으면 쉽게 사라진다. 하루를 다시 설계한다는 건 단순히 스케줄을 만드는 일이 아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탐색하는 작업에 가깝다. 하루를 어떻게 보내느냐가 인생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 것인지 결정한다는 사실을 비로소 실감하게 된다.


몇 날 며칠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낼 수도 있다. 그런 시간도 분명 필요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오늘 하루는 어디로 흘러갔는가라는 질문이 밀려온다. 퇴사 이후, 나는 작은 규칙을 만들기 시작했다.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하기로 결정한 일로 하루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조금 일찍 일어나는 것, 하루에 한 번은 산책을 하는 것, 평소에 배우고 싶었던 분야를 틀어놓고 공부하는 것, 메모장에 떠오르는 생각을 적는 것 등 작은 규칙들은 내가 하루를 소모하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누군가가 정해준 목표가 아니라 내가 선택한 방향으로 하루가 흘러가기 시작했다. 작은 변화가 쌓일수록 하루는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 아니라 시간을 쌓는 공간이 되었다. 하루를 다시 설계한다는 건 완벽함을 추구하는일이 아니다. 성취감을 증명하려는 강박을 벗고 내가 살아 있는 감각에 집중하는 일이다. 만족을 느낀 시간, 의미를 준 순간, 그 모든 것들이 하루의 질감을 바꾼다.


퇴사 후의 삶에서 계획이 필요한 이유는 단 하나다.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해서다.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기 위해서다. 하루를 단단히 만드는 일은 결국 나를 단단하게 만든다. 일로 채워졌던 하루에서 나로 채워진 하루로 넘어가는 과정이 조금 낯설고조금 두렵고 조금 설레는 변화의 흐름이다. 그 흐름 속에서 내가 어떤 삶을 향하고 있는지 조금씩 느낄 수 있게 된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