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를 떠올리면 두려운 이유 중 하나는 회사를 떠난 뒤의 나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직함으로 설명되는 존재였다. 직장이 달라지면 설명도 달라지고, 직함이 사라지면 나를 설명할 언어도 사라진다. 퇴사 이후의 삶이 불안한 것은 삶의 기반이 흔들려서가 아니라 나라는 정체성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직함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나를 마주하는 일이 어쩌면 가장 어려운 과정일지도 모른다. 직장을 떠난 뒤, 처음으로 명함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이름보다 직함이 더 선명했다. 나는 누구였을까. 회사가 나를 설명하고, 성과가 나를 증명하고, 직함이 나를 대신했던 시간 속에서 내 이름은 점점 흐려졌던 것 같다.
다시 나를 이름 짓는다는 건 직업과 분리된 채 나를 바라보는 일이다.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가 아니라 나는 어떤 사람인지 묻는 과정이다. 그 질문 앞에서 누구든지 잠시 멈칫하게 된다. 나는 일하는 나밖에 떠오르지 않았고, 일을 빼고 나를 정의하는 일이 처음에는 막막했다. 그러나 질문을 반복할수록 조금씩 새로운 단어들이 떠올랐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사람, 배우기를 즐기는 사람, 누군가에게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 나의 시간과 감정을 소중히 여기고 싶은 사람.
직업이 아닌 마음으로 설명한 나의 모습들이 천천히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깨달았다. 우리는 직업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직업을 통해 살아가는 것이다. 직함은 역할일 뿐이고 역할은 시간이 지나면 바뀌지만 나는 계속 존재한다.
다시 나를 이름 짓는다는 건 과거의 나를 지우는 일이 아니다. 회사에서 살아온 시간, 성과를 위해 쏟아낸 노력, 책임을 지기 위해 버텨온 밤들. 그 모든 시간은 누가 뭐라 해도 분명히 나의 역사다. 다만 앞으로의 시간은 그 역사 위에 새로운 이름을 쌓아가는 일이다. 직업이 나를 설명하지 않아도 나는 여전히 나로 존재할 수 있다. 비로소 그렇게 믿게 되면 퇴사 이후의 삶이 두렵기만 하지는 않다.
나를 잃지 않기 위해 나는 나를 다시 부르는 시간을 갖는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묻는 질문은 어떤 직업을 갖고 싶은지 묻는 질문과 다르다. 그 차이를 이해하는 순간, 삶의 방향이 조용히 바뀐다. 나는 지금도 나를 다시 이름 짓는 중이다. 이 과정이 언제 끝날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질문을 멈추지 않는 한 나는 계속 살아 있고, 어디로든 나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