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나의 재능을 알고 싶어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듣는 칭찬, 나의 소소한 특징들 그리고 어린 시절의 나를 돌이켜봤다. 타인이 보는 나, 내가 보는 나, 과거 경험했던 나는 모두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의 공통점은 '열정'이었다.
나는 프로 과몰입러다. 과거를 복기하며 일 년마다 핵심 키워드를 잡아봤는데 대부분 내가 과몰입한 대상이다. 그것을 누군가는 열정이라 부르고 누군가는 오타쿠라고 불렀다.
다채(多彩) @love.shini
중2병 시절 일본 음악 드라마를 보다가 쇼팽에 흠뻑 빠져 뜬금없이 피아노를 전문적으로 배우고 싶다는 시위 아닌 시위를 했다. 지금은 얼굴도 기억이 안나는 친구들한테 이 음악 좀 들어봐라고 세상에 이런 음악이 있을 수 있냐며 감동에 젖은 눈으로 쇼팽을 들려줬는데 돌아왔던 건 나를 향해 물음표를 던지는 시선뿐이었다.
중학생이 공부를 잘해봤자 얼마나 잘했겠냐만은 중학교에 처음 들어가서 전교 1등이 찍힌 성적표를 들고 왔기에 부모님은 얘가 갑자기 왜 이러나 싶었다. 아마 그게 내 중2병이지 않았나 싶다. 허락을 안 해주면 학교든 학원이든 아무 데도 안 갈 거라는 생떼 아닌 생떼 때문에 부모님은 중2병 향기로 가득 찼던 열렬한 덕심을 허락했다. 대신 전교 10등 안을 유지한다는 조건아래.
다채(多彩) 초반 과정
그러다 1년쯤 지나 피아노에 대한 사랑이 잠잠해지고 미술을 전공하겠다고 설쳤다. 그래도 미술은 갑자기가 아니었던 게 유년기 때부터 꾸준히 쌓아온 그림공책이 한가득이었기 때문이다. 뭘 하든 전교 10등은 유지해야 한다는 아빠와의 약속도 지키며 주구장창 화실을 다녔다.
중학교 시절 새벽에 일어나 연습한 뒤 학교에선 내신 공부를 하고, 하교 후엔 화실에 갔다가 밤엔 영어학원을 갔다. 하루에 4시간도 못 잔 적이 많았는데 잠은 오지만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고 커피를 마셔도 잠을 못 이겨 커피 알갱이만 모아 잘근잘근 씹어먹으며 버텼다. 그렇게 중학생이었던 나는 에스프레소와 아메리카노의 쓴맛을 깨우쳤고 이 경험이 커피사랑으로 이어져 수능을 친 뒤엔 바리스타학원을 다녔다.
다채(多彩) 중반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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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이르다고 하면 이른 나이, 적당할 나이에 현실을 직시한다. 이미 예고에 들어가 미대를 준비하는 언니를 보고 예체능에 엄청난 교육비가 들어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5살 차이 나는 남동생은 당시 매우 어리고 순해 보였다. 현실적이었던 나는 우리 셋 중에 성공을 향해 몸부림칠만한 독한 인간은 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렸고 이 나이에 가장 성공하기 쉬운 루트는 입시공부라고 생각했다.
아무도 나에게 소녀가장 가면을 강요하지도 않았지만 나는 자식 셋을 키우기 위해 시켜놓은 짜장면이 탱탱 불어 아무것도 못 먹고 일을 하는 아빠가 가여워 '내가 성공해서 부자가 되면 가족들이 돈 걱정 없이 떵떵거리며 살겠지.'라는 오만방자한 생각을 했다. 웃기게도 지금 부모님은 알아서 잘 살고 계시고 나는 내 앞 날이 제일 고민인 딸이다.
그 이후 고등학교 땐 친구에게, 한의대에 들어가선 공부와 여행에 몰입을 했다. 내 과몰입은 계속됐고 지금도 여전하다. 모든 걸 소개하긴 너무 길 것 같아 각설하고, 아무튼 조금씩의 농도 차는 있었지만 난 빠져버리면 진심으로 열정을 쏟는 사람이다. 혹자는 쓸데없는 경험이나 시간낭비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좋아하면 진심으로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었던 경험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경험들을 통해 많이 울고 많이 웃고 다양한 감정들을 느꼈다.
요즘 일 년이 지날 때마다 새로운 경험과 감정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는 것 같다. 이렇게 나이가 드는 걸까. 하지만 내게 쓸데없는 경험과 느껴선 안 됐던 감정은 없었다. 고통스러운 경험과 부정적인 감정도 온전히 느껴야 성장함을 알기에, 모든 다채로운 경험과 감정이 어우러져 내 삶이 농도 짙은 행복으로 가득 채워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