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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ini Mar 10. 2023

스무 살, 기저귀 차고 숨만 쉬면서 누워 있었습니다.

20살 입원일기

치열한 입시를 끝낸 고등학생이 바라는 게 뭐가 있을까. 드라마에서만 봤던 대학생활 로망, 판타지가 가득했다. 하지만 내가 간 곳은 백화점, 스타벅스 하나 없는 시골이었다. 부산에서 태어나고 자란 지방인으로서 서울로 가기 위해 그토록 열심히 공부를 했는데 어쩌다 보니 내가 합격한 한의대가 미세먼지 하나 없는 시골에 있더라.


심지어 20살 첫 만우절, 거짓말처럼 사고로 인해 높은 곳에서 떨어졌고 내 몸은 꼬꾸라져 바닥에 박혔다. 시골에서 제일 큰 병원에 실려갔는데 허리와 다리가 부러져 수술을 해야 하니 서울로 가란다. 덕분에 그렇게 가고 싶던 서울을 가게 된다. 붙잡고 우는 엄마와 함께.


서울에서 누구나 알법한 큰 대학병원에 입원했다. 수술을 하려고 했는데 20살, 어리니까 가만히 누워서 뼈가 자연스럽게 붙도록 기다려보잔다. '그게 가능해요..?' 수술 후유증은 평생이고 가능성이 있다니 그렇게 난 기저귀를 차고 온종일 누워있는다.


앉지도 못하는 내게 병원과 학교는 휴학을 권했다. 한의대는 1년마다 배워야 하는 커리큘럼이 짜여있고 중간, 기말 외에 수시(수시로 치는 시험)도 있다. 그리고 그 시험들은 차곡차곡 쌓여서 유급을 결정하는 지표가 된다. 한 달 이상은 병가든 어떤 이유에서도 결석을 봐줄 수 없고 수업을 못 들으면 시험도 준비할 수 없으니 어차피 유급이 될 거라는 반응이었다. 반강제로 간병인이 된 엄마도 이참에 쉬어라고 했지만 멍하니 하얀 천장을 바라보자니 심심했다. 난 학교를 가겠다고 생고집 부렸다.


머리를 굴리고 자문을 구해 학교를 가는 방법이 나왔다. 뼈가 어느 정도 붙는데 한 달이 걸린다. 이후 허리보조기를 차면 비스듬히 앉을 수 있고 석고깁스를 하면 휠체어에 탈 수 있다. 그때부터는 학교가 있는 대학병원에 입원해서 학교에 통원한다. 사정사정 부탁해서 한 달 안에 있는 시험은 추후 한꺼번에 치기로 하고 병동에 누워 동기에게 받은 수업녹취를 듣고 시험준비를 한다. (죄송하게도 교수님은 나를 위해 시험지를 2번이나 만드셔야 했다.)


스무 살, 엄마와 함께.


아픈 것도 까먹고 띄어쓰기도 무시하며 깔깔거리면서 페이스북이나 하던 스무 살에 엄마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이 모든 걸 엄마가 함께 해줬다. 기저귀 갈기, 이동침대로 옮겨 머리 감겨주기, 맛없는 병원밥 대신 딸이 좋아하는 연어샐러드 사다주기, 학교까지 차를 태워 휠체어 옮기고 강의실에 데려다 주기. 소소하고 구체적인 것들이 너무 많아 적기도 민망할 정도라 죄송하고 감사하다.


그렇게 꾸역꾸역 학교를 다닌 덕분에 어렴풋이 아주 조금 철이 들었다. 세상은 내 맘대로 흘러가지 않지만 그 세상도 함께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름 살만했다. 10년 후 오늘의 굴곡들도 특별해질 것 같다. 어차피 다 이겨낼 거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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