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hini Mar 10. 2023

한의대, 시골에서 할 수 있는 게 공부뿐이라

한의대 6년 동안 내가 한 일

그 이후 한의대 6년 교육과정 동안 내가 무엇을 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놀랍게도 딱히 떠오르는 순간이나 장면이 없었다. 진짜 공부만 했기 때문이다.


한의대 6년은 예과 2년, 본과 4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본과에 진입하면 1교시부터 9교시까지 수업이 빡빡하게 짜여 있다. 덕분에 수강신청 날에는 느지막이 일어나서 배정받은 시간표를 클릭만 하면 된다. 중간, 기말 외에 온갖 수시와 쪽지시험이 난무했고 시험을 못 치면 유급이 되어 1년 등록금을 날리고 다음 해에 그 학년을 다시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 맘 놓고 공부를 안 할 수가 없다.


물론 유급을 면할 정도로만 공부를 하면 술, 게임 등 딴 짓거리를 꽤나 할 수 있지만 아쉽게도 나는 성격이 그러지 못했다. 난 뭐에 굶주린 사람처럼 집중할 거리를 찾고 의미를 느껴야 했다. 이 한적한 시골에서 내가 집중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가장 쉬운 선택지는 한의대공부였다. 공부를 하면 혹시 내가 유급을 당하지 않을까라는 불안도 사라지고 장학금도 받는다.


공부를 하다가 히키코모리가 된 건지 히키코모리가 되어 공부만 한 건지 모르겠다. 몇 년이 지나고 보니 정말 몇 없는 친구만 남았고 그 친구와도 사이버친구마냥 매우 희박한 빈도로 연락을 주고받는 정도였다.


'진짜 6년 동안 공부만 했나요?'라고 물으면 그건 아니다. 그림 그리기, 조립하기, 고양이랑 놀기, 어린이용 리듬게임, 유럽 영화 보기 등 나름대로 방구석에서 다양하게 즐겼고 한의대는 토익 같은 자격증이나 대외활동에 대한 압박감이 없기 때문에 꿀 같은 방학엔 주구장창 여행을 다녔다.

생각해 보니 이것저것 과몰입했던 게 많다. 대부분 혼자였는데 당시엔 혼자가 익숙하고 혼자가 편했다. 지금은 그렇게까지 혼자를 자처할 필요가 있었나 싶지만 혼자 다녀온 40일 유럽여행은 내 20대 초반 몇 안 되는 귀중한 추억이긴 하다. 그리고 연애는 알아서 했으니 걱정 마시길.


 아무튼 그렇게 나는 장학금을 받고 히키코모리 본과수석으로 졸업하여 한의사가 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스무 살, 기저귀 차고 숨만 쉬면서 누워 있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