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한국에서도 자주 쓰이는 벨 에포크란 프랑스 단어가 있다. 좁은 의미로 보불전쟁 이후 1차 세계대전까지 평화롭고 우아한 시대를 가리키는 용어다. 다시 말하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아름다운 시대'란 뜻인데 대부분의 유럽 국가의 잘 나갔던 시절을 말할 때에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표현이기도 하다.
벨 에포크는 특정한 시기를 넘어 그 시대에 유행했던 문화, 예술, 풍속과 같이 맞물려 있다. 이는 한 번도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았던 현대인에게도 묘한 감성과 노스탤지어를 선사한다.
최근 국립중앙박물관 특별 기획전 <비엔나 1900> 전시를 봤다. 전시명에 지역 이름 말고도 왜 특정 연도를 내세웠을까? 아마 비엔나의 잘 나갔던 시절, 즉 비엔나 벨 에포크는 1900년이라고 암시하는 것 같다. 클림트, 에곤 실레의 작품도 포함됐다는 소식에 많은 미술애호가들의 관심과 호기심을 자아냈다. 나도 얼리버드 예매 오픈하자마자 접속했는데 대기번호 800번대로 떠서 힘들게 예매했다.
비엔나 레오폴드 미술관서 공수해 온 작품이 무려 190점. 특히 에곤 실레의 작품이 대거 선보여 기대 이상의 전시였다. 당시 비엔나 예술이 보여준 낭만과 혁신의 최대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전시의 키워드는 세기말 저물어가는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새로운 미술과 시각문화를 선보였던 '분리파 예술가들'이다. 사실 비엔나는 유럽미술사에서 변방에 속했다. 그런데 왜 20세기 초반에 갑작스럽게 유럽 미술사의 전면에 등장했을까?
<모자를 쓴 여인> 클림트, (1897)
13세기부터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도였던 비엔나는 19세기 중반 오스트리아는 헝가리를 끌어들여 이중제국을 설립했다.
비엔나는 온갖 인종과 문화의 용광로가 되었다.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는 비엔나를 유럽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해 도시 확장 계획을 하고 인프라를 구축했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이때 새로 지어진 건물에 벽화를 그리면서 유명해졌다.
그의 주변에 에곤 실레, 오스카 코코슈카, 건축가 아돌프 로스 등 전통 양식을 거부하고 새로운 예술을 보여주고자 하는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의기투합한 이들은 '분리파'라는 이름의 단체를 만들었다. 초대회장은 클림트가 맡았다.
제14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 포스터, 알프레드 롤러, 1902
비엔나 분리파는 전시를 위한 포스터도 남달랐다. 강렬하고 선명한 컬러와 단순하고 추상적인 도형으로 세련미를 과시하고 서체도 일부러 굵고 알아보기 힘든 방식으로 만들어 문자가 아닌 조형으로 다가오게 만들었다.
1899년 분리파는 독자적인 전시공간으로 양배추돔으로 유명한 분리파 회관을 지었다. 전시장 한편에는 1902년 분리파 회관에서 선보인 '베토벤'전시를 재현한 공간이 있다. 당시 클림트는 베토벤 벽화를 그렸고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가 편곡하고 지휘한 베토벤 교향곡 9번이 영상과 함께 흘러나온다.
분리파들 중 일부는 디자인 공방도 차렸는데, 공에도 예술과 같은 지위를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예술을 생활에 흡수시키려고 노력했다. 오직 아름다움과 쾌락을 위해 존재한 듯한 그 시절, 유리와 금속, 황동으로 만든 그릇과 장식품들은 요즘 제품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모던하다.
"장식은 범죄다"란 유명한 말을 남긴 아돌프 로스는 오늘날까지 비엔나에 남아 있는 카페 뮤지엄의 실내 장식을 맡았다. 장식이 없는 그의 단순한 디자인은 시대를 초월한다.
예술과 생활을 결합시키려는 이런 공예운동은 영국의 윌리엄 모리스로부터 시작되었고 비엔나를 거쳐 독일 바우하우스에도 영향을 끼쳤다. 공예품 전시실을 지나면 에곤 실레의 작품들을 전시한 공간으로 이어진다.
실레는 1907년 클림프를 만난 후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고 28세의 나이차를 넘어 절친이 되었다.
검은 바탕에 섬세하게 묘사된 흰 국화는 분리파가 보여준 장식성을 강조한다. 또한 19세기 유럽에서 유행한 일본미술(자포니즘)의 영향도 보인다.
<꽈리 열매가 있는 자화상>(1912),
에곤 실레의 아버지는 매독으로 사망하고 실레는 사촌의 도움으로 비엔나 미술아카데미에 입학했다.
불안한 정치상황은 실레에게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아카데미의 보수적인 성향과 맞지 않던 실레는 클림프를 만난 후 그를 평생 멘토로 삼으며 그의 후원으로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이어갔다.
실레는 100여 점 넘는 자화상을 남겼는데 실존적이고 심리적인 면모를 자신만의 선과 색감으로 담아냈다.
회화 외에 조소로 만든 자화상도 볼 수 있다.
성적 욕망이 장식품처럼 예쁘게 포장된 클림트와 달리 에곤 실레는 날 것 그대로 억압된 욕망을 분출시켰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클림트의 유년시절은 결핍감으로 점철된 것 같다. 실레는 어머니와 정서적 교감을 경험하지 못해 많은 갈등을 겪고 여동생과 친밀하고 복잡한 관계로 이어졌다.
<어머니와 아이>(1912)에서 자신과 어머니와의 불안정한 관계를 묘사했다. <어머니와 두 아이 II>에서는 해골이나 유령 같은 어머니와 죽은 아이 그리고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어린아이를 통해 어머니와 여동생, 자신의 불안정하고 불행한 유년을 보여준다.
어머니와 아이 시리즈
1918년 실레가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하면서 미완성으로 남은 유작 <서 있는 세 여성>
실레는 클림트가 살아있을 때 함께 밥 먹는 그림을 그렸는데 클림트가 뇌졸중으로 죽자 그의 빈자리를 담은 추모 포스터도 만들었다. 하지만 실레도 오래 못 살고 같은 해에 클림프의 뒤를 따라갔다. 세기말 비엔나를 예술의 도시로 입지를 굳히는 데 큰 역할을 했던 두 거장이 사라지자 비엔나의 황금시대도 순식간에 막을 내렸다.
클림트를 추모하며 만든 포스터(1). 원작에서는 동료들과 함께 식사하는 장면인데(2) 포스터에서는 클림트의 자리가 비어있다.
분리파 중 강렬한 표현주의 경향을 띤 오스카 코코슈카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인데 작품이 제법 많이 선 보였다. 코코슈카는 오스트리아 표현주의를 이끈 개척자로 평가받는다.
세기말 찬란하게 꽃 피던 비엔나의 벨 에포크는 1차 세계대전과 클림트와 실레의 때 이른 죽음으로 1918년 이후 사그라든다.
우리도 한때 선진국 문턱까지 가는 경험도 했고 반짝했지만 계엄 정국 이후 한류고 뭐고 이러다 다 망하는 거 아닌지 걱정됐다. 계엄 이후 한 달 넘게 진행되는 내전 상황 속에서 나처럼 살만큼 산 베이비붐 세대에게 벨 에포크는 언제였는지, 그런 게 있었는지 설문조사라도 해보고 싶었다. 시국이 이 모양이니 전시도 맘 편하게 못 보는데 하루빨리 난세가 평정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