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수묵의 매력에 서서히 물들다

수묵별미: 한중 근현대회화전을 보고

by 이선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한국-중국 근현대 수묵화 전시가 2월 16일까지 전시 중이다. 20세기 전후 작품부터 동시대 작가들이 현대적으로 변용한 수묵채색화를 148점이나 전시하고 있다. 두 나라의 전통수묵화부터 근대와 현대를 잇는 다채로운 수묵의 세계에 푹 빠져들며 비교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상범, <초동>, 1927

전시는 2,3층에 각각 한국, 중국 양 국가별로 나뉘어 전시하고 있었다. 동선은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한국 근대 수묵화부터 시작된다.

우선 근대 산수화를 개척한 청전 이상범. 그는 일제강점기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특선만 열 번을 한 산수화의 대가였다. <초동>은 전통산수에서 근대산수로 변모하는 과정을 보여준 대표작이다.

김은호 의 <애련미인도>(1921), 이유태<탐구>(1944)

근대 수묵채색화의 큰 변화는 여성이 화면에 당당하게 등장했다는 점이다. 사실 조선 왕조 내내 왕비의 초상도 그리지 않았던 점에 비교해 보면 크나큰 변화다.

대한제국 말기 순종의 어진을 그렸던 어진 화가 이당 김은호 의 <애련미인도>(1921). 당시 상해에서 유행했던 미인들을 내세운 광고 포스터 겸 달력인 '월분패'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낭창낭창한 미인들은 속살이 비치는 치마저고리를 입고 있는데 당시 조선을 대표하는 고전 미인의 전형을 볼 수 있다.


이유태는 이당 김은호의 제자로 특정 공간에 앉아 있는 신여성을 그린 그림으로 조선미술전람회 특선을 수상했다. 그림 속 공간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경성의전의 실험실이다. 당시 일본인이 대다수였던 경성의전에 조선인이 들어가는 것도 하늘의 별따기였지만 당당하게 여성 연구자를 화폭에 담았다는 사실이 시대를 앞서간 느낌이다.

한국화는 1950년대에 들어오면서 서구 모더니즘 사조에 영향을 받은 건지 점차 파격적인 조형미를 선보였다.

운보 김기창 화백의 부인인 박래현의 국전 대통령상 입상작인 <노점>(1956). 선묘보다 색면분할로 연출한 화면을 통해 전통회화에 새로운 변신을 모색한 것 같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 미술교과서에 실렸던 그림이었는데 훗날 실물로 보니 가로, 세로 2미터가 넘는 대형 사이즈 때문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일본 유학파였던 박래현은 동양화로 시작했지만 김기창과 결혼해 아이 넷을 키우며 잠자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조형세계를 확장했다. 추상과 태피스트리, 판화를 접목한 감각적인 작품들을 선보였는데 1976년 간암으로 타계한 아까운 인물이다. 언제 기회가 되면 박래현의 삶과 예술 세계에 대해 따로 이야기하고 싶다.

천경자, <노오란 산책길> (1983)

동양화로 미술계에 입문했던 천경자 화백의 작품도 볼 수 있다. 1970년대엔 상반신만 주로 그렸는데 80년대엔 전신상을 주로 그렸다고 한다. 화면 속 여성은 작가의 큰며느리라고 한다. 모델 선 며느리 입장에선 너무 기뻐 이 그림을 개인 소장했을 것 같은데 이건희 컬렉션이라고 한다.

치바이스<연꽃과 원앙>(1955)

20세기 초반 전시장을 나오면 건너편 중국관으로 이어진다.

치바이스, 우창숴, 리커란, 린펑몐, 관량 등 중국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국보급 대가들의 작품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20세기 초 중국 화단을 평정한 쟁쟁한 근대 화가들의 작품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보기 드문 기회다.

린펑몐 <물수리와 작은 배>(1961)

1920년대 프랑스 유학파였던 린펑몐은 동서양을 혼합한 중국 현대수묵화의 선구자였다. 광둥성 출신인 그는 오늘날 항주예전을 창설한 교육가이기도 했다. 7년 간 프랑스에 머물며 인상파, 야수파에 영향받아 반투명한 느낌의 채색화를 많이 그렸다. 특히 먹의 은은한 정취를 머금은 풍경화도 많이 남겼는데 위의 그림도 그 중 하나다. 문화대혁명 때 탄압을 받자 1979년 홍콩으로 이주해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 창작활동을 이어가다 생을 마감했다.

관량 <백사전>

중국의 경극을 소재로 작업한 관량은 서양화가였다가 다시 중국화로 방향을 선회한 화가. 1917년 일본에서 유화를 배운 유학파이기도 하다. 마치 만화 속 인물들을 보는 것처럼 경극 속 인물들의 표정이 생생하다

리커란<용수와 물소>(1962)

중국 전통 산수화를 현대화하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리커란이다. 검은색을 주로 사용하여 전체적으로 선명하고 묵직한 산수화는 울울창창한 초목을 연상시키면서 추상화의 느낌도 준다. 물소와 아동 이미지는 그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다.

전시장의 작품을 둘러보면 한-중 작가들의 비슷하면서도 다른 양식적 유사성을 비교해 보는 재미도 느꼈다.

먼저 최석환<묵포도도>와 우창숴<구슬빛>, 포도 넝쿨을 일필휘지로 그려낸 최석환의 작품에서 서예적 필력이 바탕이 된 작품이란 점을 알 수 있다. 우창숴 역시 선비 집안에서 태어난 근대 문인화의 대가이다. 34세에 그림을 시작해 50세에 대가의 모습을 보인 대기만성형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손 가는 대로 그린듯한 등나무의 얽힘은 언뜻 보면 무질서해 보이지만 엄청난 기교와 호연지기를 엿볼 수 있다.

김기창 <군마>와 쉬베이홍 <전마>를 비교해 볼 수 있다. 김기창의 고삐 풀린 군마는 청각장애인이었던 자신의 굴레를 벗어나려는 듯한 내면 풍경을 반영하는 것 같다. 동양화와 유화 양쪽으로 모두 대가였던 쉬베이홍은 중국 근대미술의 아버지 같은 인물이다. 쉬베이홍은 평생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말을 그렸던 말그림 대가다. 군마도 시리즈가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조금 아쉬웠다.

진메이셩 <채소가 무성하고 박이 풍성하여 수확량이 높다>, 1955, 양즈광 <광산의 새로운 일꾼>, 1972

1949년 국공내전에서 승리를 거둔 중국 공산당은 중화인민공화국을 건립하면서 '신 중국'이라고 불렀다.

새로운 사회 건설에 맞춰 문화예술계에도 사회주의 중국을 살아가는 행복한 인민들의 모습을 작품에 반영해야 했다. 이 시기 노동하는 인민들의 모습이 동양화에도 대거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여성 노동자 이미지가 전면에 부각되었다.

이종상 <장비>(1963)

산업화 시기에 접어들던 1960년대 한국 수묵화에도 노동자의 모습이 등장했다. 이종상의 <장비> 속 노동자는 각자 자신이 맡은 임무에만 집중할 뿐 그 누구도 눈을 마주치거나 다른 곳에 시선을 돌리지 않는 산업역군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이숙자<작업>, 1980


개인적으로 동양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2층 한국 현대수묵+채색화 방이 제일 좋았다. 서도호의 부친 서세옥의 추상수묵, 오래된 아파트와 건물을 주로 그리는 정재호, 코로나 시기 SNS서 화제가 된 김보희의 제주그림, 어진을 재해석한 손동현 작품을 한 공간에서 볼 수 있어 반가웠다.


7, 80년대 서울 풍경을 담은 수묵풍경들도 참 좋았다. 한옥과 빌딩이 공존하는 서울의 모습을 담아 문화적 사료로 가치가 있을 것 같다. 당시로선 새로운 시도였을텐데 그 시절 정서까지 담겨있다.

김아영 <옥인동>(1978), 이철주 <시청 앞에서>, (1978)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 본 안동숙 <태고의 정 I>(1969)은 지금 봐도 획기적인 작품이다. 제10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출품작인데 당시 서구 화단에서 유행하던 옵아트의 특성을 돗자리, 화문석, 대방석 등에서 발견해 '최초의 물감 없는 동양화'로 국내 미술계에 파장을 일으켰다.

박생광< 제왕>(1982), 조풍류 <종묘 정전> (2023)

좋은 작품이 참 많지만 다 소개할 수 없으니 직접 가서 관람하시기를 추천한다. 2월 16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펼쳐지는 한중 양국의 다양한 수묵의 세계를 체험하시기를. 입장료 4천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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