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2일 토요일 아침, 서울에서 1시간 거리지만 평소에 갈 일이 없던 부평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한국지엠 부평공장.
오전 10시 한국지엠 부평공장에서 열리고 있는 ‘모터타임즈 전시회’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부평2공장에서 일했던 노동자와 그들의 작업을 다양한 방식으로 기록한 전시를 열고 있었는데 이날이 마지막 날이었다.
33만 평 부지의 자동차 공장 중 작업이 중단된 곳에서 열리는 전시인 만큼 사전예약 필수에, 도슨트 안내를 따라야 했다. 생각보다 관람객이 많았는데 나 포함 20명은 넘었던 것 같다.
한국지엠 부평공장은 1962년 새나라자동차로 출발한 한국 최초의 완성차 공장이다. 내 또래는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대우차들이 이 공장에서 출시되었다. 르망은 물론 라노스, 누비라, 레간자 등 대우가 독자 경영하던 시절에는 현대, 기아보다 내수 점유율이 높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경인 지역의 산업과 일자리 창출을 책임지던 부평 2 공장은 IMF 이후 위기를 겪게 된다. 1999년 모기업 대우그룹 부도로 대우차 역시 법정관리를 피할 수 없었고, 3년간의 진통 끝에 GM이 새 주인으로 나서 ‘지엠대우’로 회사명을 이 바뀌었다.
2008년 또 한차례 금융위기를 맞고 2011년 '한국지엠'에서 대우라는 이름이 사라지고 쉐보레 자동차 생산공장이 되었다.
결국 수많은 종류의 차량을 생산하던 부평2공장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2022년 가동을 중단했다. 미래에 대한 어떠한 계획도 없이 그냥 방치되었던 이 공장에 지역활동가들와 아티스트들이 '멈춘 곳에서 다시 시작하다'는 주제로 공장전시를 연 것이다.
공장은 3년 동안 방치되었지만, 방금 작업을 마친 곳처럼 잘 관리되고 있었다. 물론 전시 관계자들이 공간을 가꾼 덕도 있었지만 폐쇄된 곳으로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일했던 수많은 노동자들은 다 어디로 가야 할까? 2 공장이 완전 폐쇄되면 협력업체까지 2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진다고 한다. 지역 경제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건 물론 공동체가 사라질 수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목도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사실 전시보다는 차체, 도장, 조립 공정을 맡던 공간에 아직 남아있는 엄청난 규모의 시설물들이 더 인상적이었다. 솔직히 전시된 작품들은 완성도와 별개로, 방대한 공간에 시각적 임팩트를 주기엔 버거워 보였다.
조립공장을 나서기 직전 복도에 지엠 대우 공장의 라인구성을 볼 수 있는 지도와 그동안 생산했던 차량에 관한 기록이 붙어 있었다. 저 많은 차종 중 내가 타 본 게 있으려나?
공장 안에는 이런 쉼터도 있었다. 워낙 역사가 길다 보니 공장 내 나무들도 크고 조경도 잘 되어있어 늦가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차체공장(body shop)은 프레스공장에서 나온 패널들을 용접해 차량 전체 골격을 만드는 곳이다. 이곳도 지금 가동이 중단되어 전시공간으로 탈바꿈했는데, 양정욱 작가의 작품도 있었다.
양정욱 작가는 2024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수상자이다. 주로 목재와 전구, 금속 등을 이용한 움직이는 조각으로 이루어진 설치작품으로 유명하다. 작년에 국현에서 재밌게 본 기억이 났다.
이번 아카이빙 전시에선 멈춰 선 공장에 깜박이는 불빛들로 생동감을 주는 작업을 선보였다. 작가의 작업 노트에 적혀있었을 법한 메모도 매달아 놓았다.
한편에선 공장 건물에 관한 아카이브도 전시되어 있었는데 몰랐던 사실을 많이 알게 되어 흥미로웠다.
부평2공장은 우리나라 1세대 현대 건축가에 속하는 건축가 나상진(1923~1973)이 1961년 설계했다고 한다. 그는 경기도청사, 서울 컨트리클럽 (현 어린이대공원 꿈마루) 등 굵직굵직한 건축물들을 설계했다. 작년에 오픈해 화제가 되었던 스타벅스 장충동 라운지점(구 대선제분 창업주 저택)도 나상진의 작품이다.
공장이 어찌나 넓은지 생산라인이 멈춘 곳만 둘러봐도 2시간이 걸렸다.
한때 노동자들의 휴게소였던 곳에 걸린 달력은 공장가동이 멈춘 2022년 11월에 멈춰 있었다. 그 옆에 노동자가 직접 그린 그림과 시가 걸려 있었는데 내용이 심금을 울렸다. 공장은 노조가 강력 반발하고 있지만 내년 상반기에 매각될 거라고 한다. 자동차 생산과 판매가 아닌 부동산 매각으로 수익을 창출하려는 움직임이 있어왔지만 부디 새로운 주인을 만나 계속 자동차가 생산되는 공간으로 남아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부평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