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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ve That Dec 18. 2017

영화관 비매너 총집합

영원한 전설로 남은 그 날을 되짚다

엊그제 나는 '강철비'를 보며 대각선의 팝쩝맨(팝콘쩝쩝맨)과 싸워야 했다. 자기 몸뚱이만한 팝콘통을 혼자 휘저으며 고의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깊숙한 팝콘만 꺼내먹던 그 추잡한 모습. 거기에 챙겨온 각종 주전부리의 비닐을 찍찍 뜯으며 구기기까지 했는데, 온갖 부스럭거림에 주변인이 모두 한숨을 내쉬었지만 본인만 아랑곳하지 않았던 기억이다.


4일 전 본 스타워즈도 그랬다. 매 씬마다 "와우~" "워허우~" "빼애앰!!"하며 사족을 덧붙이던 감탄사맨 탓에 나는 영화에 온전히 집중을 할 수 없었다. 요즘 영화관 일진이 안 좋다. 연속된 비매너에, 떠올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바로 1년 반 전의 '그 날'이었다. 모든 비매너가 집약되어 극장을 터뜨린 날. 더할 나위 없이 끔찍했으며 더 이상 겪으리라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바로 그 날. 그 날의 기억을 브런치로 되짚어 본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이 양심에 찔릴 일은 없길 바라며.


우리 모두 어엿한 문화인이 되도록 하자 출처: 이투데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이 날의 기억을 메모한 터라 기록은 남아있다. 2016년 8월, 나는 모처럼 어머니와 함께 영화 '덕혜옹주'를 보러 극장으로 향했다. '동주'를 보고 눈물을 흘린 기억 때문에 나는 내가 애국자라는 환상을 갖고 있었고, 그래서 일본에 맞서싸운 최후의 조선 왕녀 덕혜옹주를 보고도 감상에 젖지 않을까 약간의 기대가 있던 참이었다.


그러나 이런 기대는 시작부터 일그러지고 마는데, 이는 뒷자리에 앉은 초딩 탓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초딩의 큰 그림이었을 수도 있다. 앞으로 더욱 끔찍한 일이 벌어지니 한시라도 빨리 극장을 나가라는 예언자의 신호...


부스럭맨


어머니 뒷자리에 앉은 초딩은 부스럭거림과 덜컹임의 면모를 고루 갖춘 팔방추남이었다. 계속 구시렁거리며 불만을 내뱉는 것 같더니, 의자에서 끊임없이 몸을 뒤틀며 주변 관객을 교란했다. 잠깐 꼼지락거리다가, 의자 상태를 확인하며 자세를 고쳐앉더니 진지한 장면에서도 부스럭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난생 처음 보는 관객에 의자는 아파했다. 초딩 본인과 의자의 신음이 겹쳐 초토화 된 주변이었다. 어머니는 초딩과 그 옆자리의 보호자 분에게 주의를 주셨다.


극장에 간 다른 날에도, 옆자리의 초딩이 상영 중 계속 휴대폰을 하길래 "불빛 좀 자제해 달라"는 주의를 준 적이 있었다. 그 때의 초딩은, 내가 머쓱해질 정도로 공손하게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며 더 이상 휴대폰을 켜지 않았다. 이것이 가장 올바르고 현명한 대처 아니던가. 그러나 그 초딩은, 주변의 어른과 보호자 분의 경고는 아랑곳 하지 않고 부스럭거림을 지속했다. 상영시작 15분이 지날 때까지, 멈추지 않는 그 몸을 어머니가 참지 못 하고 한 번 더 강력히 경고하시니 그제서야 행동이 잦아들었다.


벨소리맨


어머니가 뒷좌석과 싸웠다면 나는 옆좌석과 싸웠다. 빌런 처치하는 어벤저스마냥 싸웠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닌데, 어쨌든 흐트러진 집중력을 가다듬고 계속 스크린만 보려 노력했다는 말이다. 옆자리에 앉으신 아주머니의 치명적 실수는 바로 휴대폰 벨소리였다. 초딩의 진상을 처리하고 영화에 집중하려는 찰나 옆자리에서 세찬 벨소리가 들렸다. 눈치 없이 울리는 휴대폰과 급격히 당황해 이를 막으려 손가방을 급하게 뒤지시던 아주머니. 이게 심지어 트로트였기 때문에, 한창 정색하고 있는 덕혜옹주(손예진 분)의 배경음으로 장장 40초간 트로트가 흐른 꼴이 되었다.


아주머니는 약 40초간 손을 이리저리 저으시며 방황하다가 휴대폰을 껐다. 그냥 배터리를 빼면 되는 걸 굳이 서툰 손놀림으로 거절 버튼을 찾으시던 게 짜증나기도 했고 안타깝기도 했다. 그런데 2분 뒤 한 번 더 트로트를 듣자 그 안타까움도 멀리 사라지더라.


노크맨


생리현상은 모든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일이고 이해해야 하는 일이다. 내가 배변활동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는 관객마저 비매너로 칭할 정도로 인면수심은 아닌데, 노크맨은 그 빈도가 너무 잦아 문제가 되는 경우였다.


B열에 앉은 나는, 영화관 문이 한 번 열릴 때마다 새어나오는 빛을 상당히 거슬려 할 수 밖에 없는 위치였다. 5분에 한 번이던가. 단계별로 진화하는 빌런을 만나는 기분이었다. 부스럭과 벨소리에 이어 이제는 화장실인가. 그런데 이 분의 모습을 흘기듯 보니 화장실은 아니었다. 전혀 급한 모습도 아니었고, 화장실이면 한 번에 오래 있으면 있었지 끊어서 가지는 않을 터였다. 나는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며 가지가지 한다고 혼잣말 했다. 손에 휴대폰이 쥐어진 걸 보면 전화하러 나간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나는 가지가지라는 혼잣말 이후로 영화 신경을 끄고 노크맨만 보게 되었다. 페도라 모자를 쓰고 멋을 한껏 낸 게 눈에 워낙 띄어서 그렇기도 했다. 이 분이 노크맨인 데에는 이유가 있는데, 스크린 옆문으로 몇 번을 들락거리다가 마지막엔 문이 안 열리는지 문을 계속 덜컹거렸기 때문이다. 이 덜컹거림 또한 약 30초 간 지속 되고, 나름대로 온 힘을 다 하며 문을 밀던 노크맨은, 잠시 밀어냄을 멈추고 긴장감을 조성하더니 영화관 문을 노크했다. 내가 생각한 '가지가지'를 뛰어넘는 희대의 사건이었다. 하필 B열에 앉아 모든 추태를 지켜본 나는, 노크맨의 동료로 추정되는 사람이 허겁지겁 뛰어나와 문 여는 광경까지 생생하게 확인했다.


잠꼬대맨

집에서 주무십쇼 출처 GettyImages

영화는 어느새 중반으로 치닫는 중이었다. 그간 내가 뭘 봤는 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어쨌든 덕혜옹주는 일본군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 목숨이 달린 만큼 긴박하던 그 장면. 갑자기 맨뒤 어딘가에서 "흐앙!"하는 잠꼬대가 들렸다. 세상 모르고 곯아 떨어졌다가 악몽이라도 꿨을 때 내던 바로 그 소리였다. 그 진지한 씬에서 250명 가량 되는 관객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코미디라도 본 마냥.


제법 노쇠한 목소리로 보아 할아버지셨을 가능성이 크다. 잠깐의 코미디로 긴장감을 가라앉힌 관객들은 다시 영화에 집중했는데, 덕혜옹주가 김장한(박해일 분)과 함께 근신하며 눈물 젖은 빵을 먹는 눈물 나는 씬이었다. 그 때였다. "후아앙!"이라며 더욱 격렬한 잠꼬대로 찾아온 뒷좌석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개그본능은 다소 지나친 감이 있었다. 그 때쯤 되자 반은 웃고 반은 짜증이 가득찬 볼멘 소리를 냈기 때문이었다. 우연의 일치일까, 그의 잠꼬대와 동시에 일본군은 덕혜옹주의 거처를 급습했는데, 나는 이를 독립의 한이 서린 할아버지가 덕혜옹주 힘내라는 마음에 일본군 기습을 예고한 것으로 힘겹게 받아들이고자 했다.


할아버지는 이 날의 씬스틸러였다. 두 시간 내내 이따금씩 들리던 코골이는 단 두 번의 잠꼬대에 압도 되어 그 빛을 잃고 말았다.


평론맨


이 쯤 되자 상영관은 이미 초토화 되어 소생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한 명으로 시작한 좀비가 서서히 세력을 넓혀나가듯, 내 주변 또한 점차 진상으로 물들어 갔다. 내가 앉은 좌석의 옆옆 쯤 되었을까. 이번엔 왼쪽이 아닌 오른쪽이었는데, 그 때까지 멀쩡히 영화를 보시던 중년부부가 갑자기 이동진과 박평식을 자처하셨다. 종장으로 치닫는 영화의 매 씬을 평가하며 전문가로서의 면모를 뽐냈는데, 코멘터리는 추후 발매될 블루레이/DVD에 삽입하면 될 일이었다. 미치는 줄 알았다. 옆옆 좌석이 복도를 끼고 있어 뭐라 말도 못 하는 상황이었다.


뒷좌석의 또 다른 중년부부가 질 수 없다는 듯 영화평론을 시작했고, 옆과 뒤에서 원치 않는 부연설명을 듣고 있는 나는 이쯤 되자 정신이 혼미해져 영화와 멀어지고 말았다. 지금 덕혜옹주 스토리 말하라고 하면 나는 하나도 읊을 수 없다. 기승전결로 이어지는 진상의 기억만 남을 뿐. 평점 매기기를 좋아하는 내가 평점을 거부한 몇 안 되는 영화가 바로 스타워즈와 덕혜옹주인데, 스타워즈는 내가 너무 덕후라 객관성을 잃었고, 덕혜옹주는 봤어도 도저히 본 것 같지가 않기 때문이다.


토론맨

여기가 극장입니까 광장입니까

평론의 진화형은 토론이다. 옆자리의 벨소리맨이 주변 평론에 한껏 고무된 듯 동반한 친구들과 함께 귀가 계획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미 정신이 혼미해진 나와 다른 피해 관객들은 이 논의를 말리지도 못 하고 멍하니 지켜볼 수 밖에 없었는데, 아주머니들의 귀가 토론이 어찌나 격렬했던 지 덕혜옹주보다 거기에 더 눈이 쏠릴 지경이었다.


감탄사맨


영화는 이제 클라이맥스였다. 이미 전염병이 되어 상영관을 휩쓴 진상병은, 종장이 되자 모든 관객의 몸에 침투하고 말았다. 모두가 덕혜옹주의 운명에 일희일비 하며 추임새를 넣기 시작했다. "어머나"는 중년의 탄식, "옴마야"는 청년의 탄식, "어떡해"는 소년의 탄식이었다. 나는, 정말 다양한 인간군상이 눈앞의 덕혜옹주를 보며 함께 안타까워 하는 모습에 대한민국의 미래를 보았다. 이 나라에는 애국자가 넘친다. '동주'를 보며 홀로 조용히 눈물 흘렸던 나는 어디 가서 명함도 못 내밀 정도였다. 영화가 끝나고 상영관을 나온 나와 어머니는, 사상 최초로 영화 얘기는 일절 하지 않고 관객의 애국심 얘기만 했다.



본래 극장에 가면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요소가 한두 개 쯤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날은 그 모든 집약판, 어벤저스로 따지면 인피니티 워 같은 날이었다. 나는 상영관에서의 모든 분노를 담아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고, 이 글은 열화와 같은 성원을 받으며 친구들의 공감을 이끌어 냈다. 나는 이 날, 극장이 아닌 광장에서 영화를 보았다. 기원전 아테네 광장이 이랬을까? 원치 않은 기원전 체험을 하게 되어 참 즐거운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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